영화 <작은 아씨들>(2020) 리뷰
그레타 거윅이 감독과 극본을 맡은 <작은 아씨들>(2020)은 여성주의자였던 루이자 메이 올콧의 자전적 소설, 『작은 아씨들(Little Women)』(1869)을 원작으로 하여 각색한 작품이다. 19세기 미국의 남북전쟁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두 권의 소설이 영화로 각색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고, 1900년대에도 영화와 TV드라마 각색을 통해 대중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아왔다.
안타깝게도 나의 경우, 그레타 거윅의 영화를 통해서 처음으로 ‘작은 아씨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접했다. 초등학생 시절 다녔던 논술 교습소에서의 기억이 화근이었다. 일찍 도착한 아이들을 위해 세계명작 동화책 시리즈를 비치해 놓은 논술 교습소. 책장에 빽빽이 꽂혀있는 많은 책들 속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빠르게 골라내기 위해서는 표지 그림을 선택 기준으로 삼으면 된다. 그러다 우연히 발견한 책에는 드레스를 입은 4명의 여성이 그려져 있고, 그 위에 있는 ‘아씨’라는 단어-조선시대 적 양반집 딸을 연상하게 하는-가 큼지막하게 적혀있었다. 공주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걸까? 유심히 살펴보다가, 읽지 않기로 선택했다. 어렸을 때 생긴 편견이 이렇게나 무섭다. 그 후 15년이 넘는 기간 동안, 다시 읽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놀랍게도, 네 공주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작은 아씨들’인 메그, 조, 베스, 에이미가 가족으로서 함께 보낸 일상적인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노예제 폐지를 지지하는 남북전쟁 참전으로 집을 비운 아버지. 풍족하지 않은 상황이지만, 기꺼이 어려운 이웃과 참전용사를 도우려 하는 마음이 따뜻한 어머니. 그 아래서 서로 복닥거리며 생활하는 네 자매.
착한 아이가 되고 싶지만 허영심이 조금 있는 메그와 직설적이고 불같은 성미를 지닌 열정적인 작가 조. 조용하지만 자신만의 확고함을 지니고 있는 피아노 치는 베스. 꾸미는 것을 좋아하고 철 없어 보이지만 또 마냥 그런 것만은 아닌 화가지망생 에이미. 이 가족을 애정하고 케어하는 가정부 한나. 그리고 이웃집 소년 로리와 그의 할아버지까지.
소설 『작은 아씨들』에서는 1권에서 자매의 유년시절을, 2권에서는 어른이 된 이후의 일들을 시간 순으로 다루었지만, 영화는 조금 다르다. 19세기 뉴욕의 어느 하숙집에서 생활하는 조 마치가 신문사에 글을 투고하고, 하숙집에서 과외 선생도 하며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바삐 사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어느 날, 어머니로부터 동생 베스가 위독하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고 급히 고향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깜빡 잠이 든 조. 7년 전 자매들과 함께 보냈던 따뜻하고 찬란했던 유년시절의 꿈을 꾼다.
이후, 성인이 된 자매들의 모습과 7년 전 그들의 유년시절 모습을 교차로 등장한다. 꼭 꿈의 방식일 필요도 없다. 발작적으로 떠오르는 기억의 속성처럼 유년시절의 일들은 영화 곳곳에서 떠오른다. 이를 직관적으로 구분하기 위해서, 유년시절의 장면은 따뜻한 주황빛 톤으로, 성년시절의 장면에서는 푸른 회색빛으로 화면이 구성되어있다.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또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유년시절로 보이는 따스한 기억들은 극 중 조 마치가 집필한 책, ‘작은 아씨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며, 『작은 아씨들(Little Women)』의 저자 루이자 메이 올콧이 고난이 많았기에 썼던 즐거운 이야기기도 하다.
그러나 극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따지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네 자매의 찬란했던 유년시절에 대한 이야기와 해피엔딩이, 책이라는 독립적인 시공간 속에 소중하게 보관되었다는 것이다. 꺼내어볼 수 있는 어떤 사진처럼 말이다. 관객들은 잊어버린 그들 각자의 유년시절을 떠올리거나, 혹은 새로운 유년시절의 기억을 선물 받는다.
조가 해변가에서 베스에게 낭독해준 문장을 다시 한 번 읊어보자.
우리가 선물받은 것은 어쩌면 사랑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 땅을 이토록 사랑할 수 있음은 이 땅에서 보낸 유년시절 때문이며, 자그마한 손가락으로 따던 그 꽃들이 봄마다 이 땅에서 다시 피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가. 모든 것이 자명하고 자명하기에 사랑받는 이 달콤한 단조로움은" - Mary Ann Evans (필명 : George Elliot)
그레타 거윅은 21세기 버전 <작은 아씨들>을 통해 ‘예술하는 여성’과 ‘여성’ 그리고 ‘돈’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한다. 극 중 메그, 조, 베스, 에이미는 모두 예술가적 기질(배우, 작가, 음악가, 화가)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술에 대해 지닌 태도는 각기 다르다. 19세기 미국, 여성이 자신의 자산을 갖는 것도 재능을 펼치는 것도 녹록치 않았던 현실 속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원하는 삶을 살기위해 고민하고, 최선의 선택을 내리는 네 명의 젊은 여성의 이야기는 자매애 이외에 것을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다. 한 인간의 성장에 대한, 그 중 특히 여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영화는 가족영화, 성장영화인 동시에 여성영화이기도 한 것이다.
관객이 영화를 통해 받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선물은 바로, 이야기 바깥의 이야기이다. 그레타 거윅은 조 마치라는 캐릭터를 통해 우리에게 저자인 루이스 메이 올콧의 이야기 또한 전달한다. 영화의 도입부와 종결부의 조가 출판사와 협상하는 장면을 기억하는가? 편집자는 한결같다. 글이 팔리기 위해서 결말 부분에 여성캐릭터는 결혼하거나 죽어야한다고. (그니깐 곧 죽어도 결혼시켜야한다는 이야기다.) 이어지는 장면은 조 마치와 프리드리히 교수가 빗속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다. 조 마치는 원하지 않지만 소위 ‘로맨틱’한 결말을 내는 대신, 그녀의 경제적 독립을 가능하게 할 인세와 판권을 지켜낸다. 이것이 과연 이야기 속 조 마치만의 이야기일까?
영화 초반부와 후반부에는 ‘작은 아씨들(Little Women)’ 책이 두 번이나 등장한다. 첫 등장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실제 『작은 아씨들』로 표지에 찍힌 도장에는 L.M.Alcott (실제 저자)이 적혀있다. 두 번째 등장은 이야기 속, 조 마치가 완성한 ‘작은 아씨들’로 표지가 찍힌 도장에는 J.M.March가 새겨져 있다. 이러한 힌트 덕분에, 우리는 극 중 조 마치의 선택을 통해 저자 루이스 메이 알콧이 이야기 바깥에서 실제로 내려야 했던 선택까지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썩 마음에 들지 않는 결말을 짓되, 자신의 삶과 권리를 위해 ‘돈’과 ‘판권’을 지켜내는 선택 말이다.
그렇게 영화는 루이스 메이 올콧이 집필한 『작은 아씨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캐릭터인 조 마치의 여정을 따라가 ‘작은 아씨들’의 이야기를 다시 탄생시킨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관객은 루이스 메이 올콧의 조 마치를 바라보는 동시에 조 마치 속 루이스 메이 올콧을 바라본다.
영화는 마지막으로 조의 글이 인쇄된 종이들이 실로 묶여 책으로 탄생하는 과정과, 조 마치 (혹은 루이스 메이 올콧)가 만들었을 해피엔딩을 번갈아 보여준다. 해피엔딩 속, 조는 성별에 상관없이 배울 수 있는 학교를 설립했고, 그 안에서 그녀의 자매들은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곳을 꿈꾸며, 혹은 어릴 적 다락방에서 깔깔거리며 웃던 시절을 회상하며 조는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우리는 작가로서의 조 마치를 바라보며, 작가로서의 루이자 메이 올콧을 떠올렸고, 그들을 바라보는 작가로서의 그레타 거윅을 바라볼 수 있었다. 결국 그 끝자락에서는 자신의 삶을 써내려가는 작가로서의 내 자신도 바라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이 문장에서 ‘작가’라는 단어를 ‘여성’이라는 단어로 바꾼다면, 그것 또한 어렵지 않게 가능했다.
루이자 메이 올콧과 그레타 거윅이 선물한 이 이야기 위에, 나를 포함한 수많은 조들의 이야기들이 겹겹이 쌓여가고 있는 걸 느낀다. 그 순간 나는 영화나 책 속의 결말보다도 더 중요한 것들이 이야기 곳곳에 놓여있고, 그것들은 항상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으며, 그리하여 어떤 이야기든 최후의 결말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덕분에 마음에 들지 않는 결말을 가진 수많은 영화들과 화홰할 수 있게 되었고.
그렇게 ‘작은 아씨들’의 이야기는 내 안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자, 그럼. 우리는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써내려갈까? 그것이 너무 궁금하다.
by B612
영화와 현실 사이를 정처없이 떠돌아다닙니다. 고로 여행자 입니다.
어딘가에 두고 온 여자아이를 자꾸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이것이 나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