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매의 여름밤>(2020) 리뷰
by FernWeh
영화적 공간을 통해 먼 곳을 가까이에서 그리고 가까운 곳을 멀리서 그리워합니다.
8차선 대로와 오래된 골목 시장을 잇는 어귀에 40년은 족히 된 모서리 집이 있었다. 손수 벽돌을 세운 할아버지와 수십 개의 장독을 옥상으로 올린 할머니는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아슬아슬 걸려있는 기왓장을 갈아 끼우며, 모서리가 닳도록 그곳을 지켜냈다.
"우와, 여기 이제 건물 다 올렸네요."
구십이 훌쩍 넘은 할아버지와 어느덧 초등학생 종손보다 자그마해진 할머니는 여전히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다.
"여그서, 느 삼촌이 다 컸어."
삼촌은 여기서 다 컸다. 각자의 속도로 나와 내 동생도 이곳에서 다 컸다.
자꾸 감기는 늙은 눈을 추키며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이곳에서 시간을 보는 걸까.
나에게도 여전히 색 바랜 벽돌집의 냄새, 여름 방학마다 부산에서 올라오는 동갑내기 사촌과 우리 남매가 할머니 몰래 숨어들던 세모난 옥상 창고, 막 제대한 막내 삼촌 담배 냄새가 늘 은근히 배어있던 건넛방이 보인다.
지금은 신축 빌라를 홍보하는 입간판이 서 있는 그곳에서, 우리 가족은 여전히 기억의 장소를 본다. 이 감각은 우리 안에 깊이 각인되어 서로 닮았고 또 다르다.
한 가족의 어느 여름을 소중히 담아낸 윤단비 감독의 <남매의 여름밤>은 나에게 '기억의 장소'에 대한 현시로 다가온다. 문을 열고 닫으며 서로의 존재를 새기는, 공간으로 이야기하는 영화.
오도카니 기억을 여미던 옥주, 동주 그리고 아빠는 다마스 크기만큼의 짐만 챙겨 볕이 드는 한낮에만 둥둥 떠다니는 집먼지가 보였을 반지하를 떠난다. 재개발 지역임을 드러내는 빨간 'X' 표시만이 뒤에 남아 이들의 부재와 회귀할 장소를 잃은 상실감을 대신한다. 울퉁불퉁 골목길을 빠져나와 도착한 곳은 할아버지의 2층 양옥집이다. 어느 여름의 기억은 집 앞에 어색하게 서 있던 두 남매가 낡은 대문을 열고 이곳으로 들어서며 시작된다.
감독은 남매가 정원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담아내는 카메라의 시선부터 차곡차곡 공간이 스스로 발화하는 영화임을 드러낸다. 반 층 정도 올라가야 현관문이 있는 할아버지의 양옥집에는 성인 키보다 훌쩍 큰 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이 넘실거린다. 카메라의 눈길이 이들에게 보내는 온기가 이 양옥집을 품은 할아버지의 시선과 닮았기 때문일까. 집 안으로 들어서는 남매의 모습을 롱 쇼트로 담아내는 프레임은 어쩐지 따뜻하다.
할아버지는 말없이 그곳에 존재함으로써 가족과 소통한다. 어두운 방 TV 앞에 앉아서도, 잠자리에 들면서도 할아버지는 항상 가족들이 함께하는 거실을 향해 있다. 할아버지와 함께 늙어왔을 낡은 소파는 집 안과 밖을 채우는 햇살과도 같이 곳곳에 시선을 보낼 수 있는 경계에 놓여있다. 할아버지의 미소가 묻어나듯, 안과 밖이 공존하는 중간지대에 옥주의 시선이 담긴다. 옥주의 조용한 배려가 할아버지와 닮아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공간에 스미는 서로의 존재 때문일까.
1층과 2층을 구분하는 중문과 여러 개의 문이 집안 곳곳을 분할하는 구조임에도 양옥집 내부에서는 단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철제 대문부터 2층 옥주와 고모의 방까지는 마치 닫히지 않는 할아버지의 방문처럼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 개구진 동주의 발소리는 집안 이곳저곳의 경계를 허문다. 소중하게 가꿔진 텃밭의 작물은 가족의 식탁에 오른다. 서로를 향한 웃음과 목소리 그리고 할아버지의 오래된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이들을 함께 적셔나간다. 이렇게 기억의 장소는 삶의 맥락으로 자리 잡는다. 이들을 가족으로 묶어내는 것은 물리적 실체 없이 문틀과 담을 넘나드는 흔적이다. 이는 서로의 목소리와 음악 취향 그리고 향기를 공유하는 정서이자 기억의 심층이다.
아마도 이곳에서 다 컸을, 겸연쩍은 두 어른 남매와 두 아이 남매는 어느 여름날, 할아버지의 낡은 소파에 앉아 그리고 텃밭 구석에 서서 함께 그리고 제각기 이곳을 기억의 장소로 새길 것이다. 우리는 마음의 장소를 함께 향유하는 사람들을 가족으로 아우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장소의 기억으로 그리고 기억의 장소로, 어느 여름밤은 이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스며든다.
+ <동경 이야기>로 잘 알려진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다다미 쇼트'는 당시 영화 산업을 주도하던 서양인들에 의해 카메라와 스타일의 독창성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일상적인 삶을 대하는 감독의 태도로 다가온다. 야스지로의 다다미 쇼트가 그랬듯이, 영화 속 세계를 완전한 환영이 아닌 우리의 삶 그 자체로 그려내는 윤단비 감독의 카메라에도 '마루 쇼트'라는 별칭을 붙여주고 싶다.
그의 영화언어는 우리의 일상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