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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샐빛 Dec 22. 2023

9. 놀이터라는 세계

아이는 어린이집, 유치원을 다닐 때부터 알아주는 놀이터 죽돌이(?)였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러하겠지만 바깥 놀이를 너무 좋아해서 비가 오면 우비를 입고 나가고 눈이 오면 중무장을 하고 나가 놀이터에서 제일 늦게 집에 들어오는 아이였다. 딱히 아이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 주어야 한다는 철학이나 신조는 없었지만 '아이는 뛰어놀아야 한다' 만큼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여서 더우나 추우나 나 역시 놀이터를 함께 지키며 아이와 남다는 전우애?를 쌓았다.


문제는 하노이에 와서부터였다. 코로나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지 못했던 시기였을 뿐 아니라 날씨도 더워  예전같이 놀이터에서 노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게다가 놀고 싶어도 함께 놀 친구도, 적당한 놀이터도 없었다. 놀이터라고 생긴 공간은 대여섯 발자국 뛰면 끝날 정도로 좁았고 그나마 그곳에서 조금 놀아볼까 하면 어느새 학원으로 가 버리는 아이들 때문에 하교 후에는 거의 집으로 직행해야 했다. 남는 시간을 혼자 몸을 배배 꼬며 놀아달라고 덤비는 아이를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무렵 나도 학원을 보내기 시작했고 그렇게 1~2학년을 놀이터 없는 삶을 보냈다.


그리고 2학년의 끝을 향해 달리던 시점 이사를 하게 된 아파트에서 우리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놀이터에서의 삶을 되찾게 되었다. 아파트 중앙에 제법 아이들이 놀만한 크기의 놀이터가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하교를 하거나 하원을 한 후 엄마들에게 가방을 내던지고 무조건 놀이터로 달려갔고, 가방을 받은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간식을 나눠 먹이며 삼삼오오 이야기꽃을 피웠다.


아이는 이미 학교나 학원에서 친해진 친구들이 있었기에 스스럼없이 놀이터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형성되어 있는 엄마들의 무리에 선뜻 다가가기도 어려웠을 뿐 아니라 원래부터 반모임과 같은 학부모 커뮤니티에서는 속하고 싶지 않아서 한동안 혼자 놀이터 언저리를 맴돌았다. 아이만 놀게 하고 집으로 올라가고 싶었지만 한 번은 내가 자리를 비운 때에 베트남 사람과 문제가 생긴 적이 있는 데다 다른 엄마들은 다 있는데 혼자만 엄마가 없는 건 싫다고 하는 아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이를 기다려야 했다.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시간은 고역이었지만 그나마 아이가 신나게 뛰어놀 수 있으니 그걸로 위안을 삼았다.


하지만 놀이터 외톨이로서의 시간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같은 학교에 같은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 사이에서 매일같이 얼굴을 보는데 다른 엄마들과 서로 말을 안 트고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조금씩 친절하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 역시 자연스럽게 놀이터 밖 엄마들의 세계로 초대받았다. 놀이터 안에서 아이들이 노는 동안 놀이터 밖에서는 각종 학교 소식과 학원 정보, 각종 생활 정보 등이 쉴 새 없이 오갔다.


솔직히 나는 엄마들의 커뮤니티에 속하는 것을 기피하는 편이었다. 친구가 없는 것은 좀 심심할 수 있지만 원래 혼자서도 잘 있는 편이고,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이라 무리에 휩쓸리면 내 의견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끌려다닐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예전에 한국에서 유치원 반모임에 한번 끌려(?) 갔다가(고작 유치원인데, 지금 생각하니 어이가 없지만) 그 작은 모임 안에서도 반장질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도 보고, 모임을 주도하며 온갖 정보와 사람을 틀어쥐려고 하는 사람도 보고, 언니동생하며 친하게 지내다 결국 분열이 나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나니 더 그런 편견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아침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우르르 커피숍으로 몰려가서 떠들고 밥 먹다 하루를 다 보내게 될까 봐 지레 겁먹고 피하려고 했었는데, 어떤 일이든지 그렇지만 직접 경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듯이 그건 나의 편견이었.


이곳에서 알게 된 엄마가 준 정보로 1년 만에 요가를 다시 시작했고,

베트남어 선생님을 소개받아 집에서 베트남어 공부도 하고 있다.

아침에는 아이를 스쿨버스에 태워 보내고 아파트 단지를 30여 분 돌면서 운동을 함께한다. 그리고 커피 마시러 가느냐? 그렇지 않다. 운동이 끝나면 각자 집으로 돌아가거나 요가를 하러 간다. 커피는 운동이 끝나고 일주일에 하루만 함께 마시는 룰도 있다. 아침에 아이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핸드폰을 켠 채 그냥 하루를 보내버리는 날도 많았는데 운동을 하고 들어오니 계속 몸을 움직여야 할 것 같아 아침 청소와 집안 정리를 마치는 것이 아침 루틴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모두 이곳 엄마들의 도움 덕분이다.


물론 사교육 정보의 바다에서 흔들리고 있기도 하다.

지금 영어학원, 태권도, 피아노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여기 와보니 다들 스케줄들이 후덜덜이다. 하지만 다들 고맙게도 그 정보를 공유하고 해 보고 좋은 것들은 함께하자며 권유해주기도 한다. 정보의 갑질 같은 것은 없다. 같은 학교를 다니는 같은 학년의 아이들이 모여있기 때문에 아이들의 성장, 성취 정도의 차이에 따른 미묘한 경쟁이 있을 법도 한데 아직은 저학년이라 그런지 그런 기류는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저것 권유받고 소개받는 정보들로 나 역시 아이 교육에 대해 바짝 더 신경 쓰는 계기가 되고 있기도 하다. 겨울방학을 맞아 아이들의 스케줄을 짜느라 고민이라는 엄마들을 보며 혼자 너무 여유롭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이 들기도 하지만 아직까지는 정보들을 참고하는 수준으로 버티고 있다. 도움의 손길들은 고맙지만 아이도 나도 감당할 수 있는 크기가 그다지 크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이의 교육보다는 내 교육, 내 인생을 더 잘살고 싶은 사람이다. (아직 이런 얘기까지 할 사이는 아니므로 아이들 성적, 학원 진도, 교재 얘기가 한창일 때는 조용하게 있다. 왜냐하면 잘 모르니까.)


이사를 오고 나서 어쩌면 생활이 가장 많이 바뀐 사람은 나 같다. 남편은 출퇴근 경로가 바뀐 것 외에 달라진 것이 없고, 아이는 방과 후에 놀 수 있는 놀이터가 생겼다는 것이 달라졌지만

나는 놀이터를 중심으로 알게 된 사람들도, 생활 반경도, 활동의 종류도 전부 달라졌다.

놀이터라는, 작지만 거대한 세계에서 내년에는 또 어떤 일들이 벌어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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