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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삐삐 Oct 29. 2020

떨어져 살자

가족이 이런 거라면, 난 결혼 안 할래 4

    

집 안에서 우리는 가장 날 것의 편한 모습과 최악의 모습들을 봤다. 그래서 같은 지붕 아래의 모습만을 진짜 모습이라고 착각했다. 서로가 보지 못하는 밖의 모습이 집의 시간보다 훨씬 길고, 대부분이라는 걸 상상하지 않았다. 서로에게 붙여진 엄마, 동생, 언니라는 호칭으로만 바라봤다. 언니가 어떻게 첫사랑을 하고, 고백에 실패했는지, 첫 연애는 어떻게 시작하고 끝났는지 단편적인 이야기만 알 뿐이다. 그 사랑이 어떤 상흔을 만들어내고 어떻게 언니의 삶에 공명했는지는 모른다. 우연히 엄마 친구들에게 엄마가 얼마나 일을 잘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신경을 세세히 쓴다든지, 강단이 있는 사람인지 칭찬을 듣고서야 직장에서의 모습을 처음으로 상상해봤다. 우리는 생동하고 변하는 개별의 삶을 집이라는 부분에만 가둬놓고 보이는 대로만 봤다.


잘 안다는 착각은 언니의 정신병을 엄마와 내가 다 이해해야 한다는 의무로 이어졌다. 언니의 병으로 엄마와 내가 힘들다는 게 비칠수록 고통을 내보이는 방식은 심해져갔다. 물건을 던지고, 가구를 부수는 일들이 한 달에 한 번은 일어났다. 부수는 것으로 부족했는지 언젠가부터 나뿐만 아니라 엄마에게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결국 언니는 고등학생 시절 짐을 챙겨 외갓집으로 갔고, 대학은 서울로 갔다. 거리가 생기자 셋은 못 본 기간 동안의 서로의 일상을 다른 이의 삶으로 이해했다. 집에 가끔 돌아오는 날이면 엄마는 부추전을 구웠다. 언니는 지글거리는 팬 너머로 부엌 의자에 앉아 엄마의 등을 보며 조잘거렸다. 새로 사귄 친구들과의 관계, 하숙집 주인과 플랫 메이트들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엄마는 새로 시작한 취미와 직장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는 것도 사흘 정도, 서로를 이해하고자 마음을 쓰기보다 관성적으로 알고 있다는 착각에 다시금 빠지게 됐고, 싸웠다. 헤어지기 마지막 날 쯤에는 또 우리가 떨어져 살아야 했던 이유를 되새겼다. 가끔씩 얼굴만 보는 사이의 거리가 적당했다. 우리는 떨어져 살아야 했다. 


그러지 못했다. 언니는 휴학을 하고서는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최악이라고 믿었던 스펙트럼 끝에는 꼬리가 길게도 숨어있었다. 자신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움직이는 차 문을 열고 내리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화가 나서 차도 정중앙을 걸어가기도 했다. 싸우다 말고 방문을 걸어 잠그고 정신과 약 한 달치를 털어먹고 반듯이 누워있었던 날도 있었다. 구급차 아니면 15분 거리에 사는 삼촌이 와야 싸움이 잠시 멈추는 상태가 되었다. 가족 싸움은 죽고 사는 문제가 됐다. 그러한 전쟁이 한 달에서 일주일, 일주일에서 사흘로 줄어들어 갔다. 서로가 서로를 갉아먹어갔고, 날카로워졌다. 지옥 같은 싸움의 반복에서 벗어나려면 누군가 한 명은 죽어야 끝날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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