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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삐삐 May 06. 2022

짝사랑으로 끝난 남아선호사상

가족이 이런 거라면, 난 결혼 안 할래 5

* 여기서 나오는 모든 친척 관계는 외가이지만 외는 붙이지 않는다. 


큰집에 따라가겠다 떼쓰던 설날, 큰삼촌은 나를 혼냈다. 

“이렇게 고집부리는 거, 너 세뱃돈 더 받으려고 가는 거 아니냐.”

할아버지는 큰할아버지댁에 꼭 남자만 데리고 가셨다. 거기서 사촌오빠와 사촌 남동생은 용돈을 십몇만 원씩 더 받아왔다. 남자라는 이유로 매년 두 번씩, 평생을 큰집에서 내 사촌오빠와 사촌 남동생은 이득을 보는 게 여덟 살 내 눈에도 합당하지 않았다. 맞는 말이니 황당할 수밖에. ‘맞지, 그럼?’이라는 말을 차마 하지는 못하고 속으로조차도 웅얼거리고 있었다. 말이라도 했으면 약간은 덜 억울하지, 어린 것이 돈 밝힌다고 된통 혼났다. 

집안 장남인 사촌오빠는 할머니 이경애의 장례식의 유가족 방안에서 춤까지 출 만큼 정신적 유대가 없었음에도 할아버지의 모든 사랑을 받았다. 안타깝게도 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할 의향조차 없었던 사촌오빠는 가족 해외여행은 가도 공부를 핑계로 비일비재하게 가족 일정에 나타나지 않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전체 가족여행, 사촌오빠는 ‘중학교 3학년’ 중요한 시기라 공부해야 한다는 핑계로 2박 3일 제주도 여행을 가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준 사랑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조부모님과 어렸을 적부터 같이 살았던 나는 경애의 밥을 먹고 자랐다. 내가 밥을 씹는 동안 방앗간 참기름을 잔뜩 넣은 고소한 시금치를 밥 위에 얹어 김을 말아주셨다. 식탁에 앉을 때면 좋아하는 콩자반을 놓아준 경애. 유치원 가기 전이면 매일 검정 자개 거울 앞에서 내 머리를 꽉 묶어주었다. 내 손에는 할아버지의 기억이 있다. 내게 틀린 젓가락질을 고쳐주기 위해 몇 번이고 가르쳐 주셨다. 할아버진 언제나 내가 얌전해져 사람들의 사랑을 더 받을 수 있기를 기대했다. 따로 떨어져 살고서는 매번 떠날 때마다 창가에서 자기의 집으로 향하는 서량(필자의 엄마, 할아버지의 딸)의 차를 지켜봤다. 


나는 그들을 사랑했다. 법적 성인이 되고서도 조부모님께 매번 볼 뽀뽀를 했다. 가끔 요리도 해드리고 부산에 갈 때마다 얼굴을 비췄다. 그래서 나는 자주 볼 수 있는 사람이었던 걸까. 조부모님 방 사진에는 걸릴 필요도 없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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