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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삐삐 May 06. 2022

아직도 남자, 여자 밥상 따로 먹는 집도 있다더라

가족이 이런 거라면, 난 결혼 안 할래 6

집안의 마지막 제사를 기억한다. 그날은 내 조부모님 1주기 합동 제삿날이었다. 집안에서 마지막으로 있을, 동시에 가장 큰 제사였다. 전날 퇴근한 몸을 이끌고 서량은 식혜를 만들고 조부모님이 좋아하셨던 반찬들을 하느라 새벽 세 시까지 요리했다. 나는 이틀 동안 서울-부산-강릉-서울을 이동하는 스케줄을 무리해서 소화하며 내려갔다. 


삼촌의 아내들과 서량이 제사상을 다 차리고 나자 제일 큰 남자 어르신이 절하라고 외쳤다. 조부모님 딸인 서량보다 남이라고 할 수 있는 ‘할아버지 여동생의 남편’이 맨 앞에 섰다. 이어 나의 두 삼촌(조부모님의 아들), 할아버지 사촌의 아들들이 섰다. 그 뒤에서야 겨우 뭉그적거리며 숙모와 장녀인 서량, ‘남은’ 여성들이 섰다. 남성들의 등은 언제가 견고한 경계였다. 뛰놀던 아이들도 ‘자연스레’ 질서를 따라 여자아이들은 뒤에 남자아이들은 앞에 섰다. 돌아가셨을 때마저도 이혼하여 ‘갈 시가가 없는’ 서량과, 편모가정의 짐인 딸인 나는 뒤에 서 있는 병풍 같은 존재로 서 있었다.


사촌 여동생의 등을 부추겼다. “앞에 가서 서~” 말괄량이인 초등학생 1학년인 내 사촌 여동생도 그 자리가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내가 잡은 손을 거부했다. 내가 잡아야 할 손은 사촌 여동생의 손이 아니었다.


종일 요리했을 서량과 숙모 손을 잡고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아재는 “그래, 느그가 앞에 서는 게 맞지.” 하며 비켜주셨다. 사촌 여동생들도 슬그머니 옆에 섰다. 


그렇게 뒤에 서는 게 억울하더나. 앞에 서나 뒤에 서나 똑같다.

큰삼촌은 웃긴다는 듯 장난스레 말했다. 평생을 이 집안 맨 뒤에 서서 절했던 자신의 아내를 옆에 두고서. 

제사가 끝나자 남성들이 차지했던 안방의 제사상은 여성들에게 넘겨졌다. 그들은 이제 마루를 차지했다. 마루에 길게 밥상을 펴고 식탁에 서열대로 앉았다. 여자와 남자들이 밥 먹는 테이블은 달랐다. 아니, 여자들의 식탁은 없었다. 식탁을 펴고 수저를 놓는 수고로움을 했으니 그 뒤는 여느 때처럼 이야기에 집중해야 하는 시간이 됐다. 집안에 누가 성공했냐 느니, 누구 아들이 로스쿨을 들어갔냐느니. 


그런 것들을 떠드는 동안 언제나 그들은 모른 채로 코스요리가 준비됐다. 처음에는 소, 돼지, 닭. 고모할머니들은 안방에서 그들을 썰고 찢었다. 부엌에는 서량과 숙모들이 기름장과 쌈장을 만들어 마루의 남정네들이 먹는 데 불만이 없게끔 준비했다. 다음 단계로 안방에서 다른 생선을 발라내고 과일을 깎았다. 그동안 부엌에선 분주히 탕국과 나물 비빔밥을 준비하며 동시에 밥을 먹지 않으려 하는 아이들을 부르고, 달랬다. 서량은 부엌 빈 의자에서 밥을 먹다가도 무엇이 더 필요한지 마루를 내다보고는 했다. 여느 제사처럼 숙모들은 요리하면서 이미 사라진 입맛 때문에 포도 몇 알, 딸기 몇 알로 허기만 채울 것이었다. 고모할머니들은 안방에서 썰고 남은 것들을 주워 먹어가며 식사를 때울 터였다.


사촌오빠한테 비빔밥을 서빙하라고 닦달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나는 안방에서 고모할머니들께 할아버지들과 같은 식탁에서 식사하라고 떠밀었다. 도마 주변에 널브러져 펴놓은 신문지 위가 ‘편하시다고’ 손사래를 치셨다. 내가 과일을 다 깎을 테니 제발 저기서 편히 앉아서 이야기 나누시면서 밥 좀 드시라고. 식탁에 할머니들 자리를 위해 아재들 엉덩이를 비집고 수저를 놓았다. 그제야 쭈뼛거리며 할머니들은 일어나셨다. 

아이고, 내가 그 앉아도 되나. 내 저서(저기서) 먹어도 되는데.

괜히 말을 덧붙이셨다. 그곳에서 할머니들은 자신의 남편들과 조카들 사이에서 웃으며, 그들 생 처음으로 제삿날 식탁에 앉아 밥을 먹었다. 안방에 홀로 앉아 과일을 깎아 나르며 검은색 벽 같은 등 틈에 분홍색 굽은 등을 바라봤다. 나의 인생 이십 년 만에 처음 본 광경이었다. 할머니들 눈앞에 있는 풍경은 칠십여 년이 걸렸을 일. 할머니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할아버지들은, 아재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 남성 친척들이 일부러 그랬을 리 없다. 그들이 일부러 견고한 등으로 벽을 만들고, 나를 병풍으로, 할머니들을 바닥으로 내몰았을 리 없다. 그저 계속 어렸을 때부터 윗세대들이 그랬듯 그들은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해 볼 기회도, 의도도 없었을 테다. 그래서 그들은 내 평생보다 더 긴 세월 동안 그들의 엄마를, 그다음엔 그의 아내를, 가족을 땅바닥에 앉혀 밥을 먹게 할 수 있었다. 


만약이라는 가장 쓸데없는 질문을 한다. 그날은 그저 마지막이기에 그들이 감히 보여줄 수 있었던 아량이었을까. 조부모님이 여전히 살아계셨다면, 제사를 했다면, 어땠을까. 다음, 그다음 제사에도 내 손에 이끌려 다른 여성들이 멈칫거리며 나왔을까, 아니면 자연스레 같이 절하기 시작했을까. 남성들도 그들의 아내가 먼저 들어간 그들의 집안 부엌으로 마침내 들어가 코스 서빙을 멈추고 다 같이 준비하고, 다 같은 식탁에 앉아 밥을 먹을 수 있었을까. 


한 세대가 떠나고 제사가 사라진 뒤 그들이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길이 없다. 그들이 바뀔 수 있었을 거라고 얘기할 수 있는 희망 자체를 논할 수 없다. 경애는 저 식탁에 앉을 기회조차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나의 할아버지, 기영과 화해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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