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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삐삐 May 25. 2022

공평하기 어려운 결혼

새로운 식구를 찾아서 1

“여자애들이요.”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가르치고 있는 중학교 1학년 남학생이 학교에서 준비물 챙기는 게 어려워 잘 챙기는 친구의 특징을 물어보니 나온 답변이었다. 주변의 남자 친구들은 안 챙겨오냐고 물어봤더니 대부분 안 챙겨온다고 그랬다. 언제부터 여성과 남성은 다르게 자랐을까. 


내가 기억하고 가장 어린 시절부터 되짚어봤다. 나는 명절 때마다 네 명의 사촌 동생들을 ‘돌봤다’. 그러나 동갑 구 개월 생 먼저 난 사촌’오빠’는 사춘기가 되고부터는 같이 ‘놀지’ 않고 혼자서 게임을 하고 누워있었다. 같은 학년임에도 오빠는 공부하기에 그날만은 쉬어야 하는 사람이었고, 나는 동생들을 돌보고 방 뒷정리를 도맡아 하는 존재였다. 그래놓고 절은 장손인 오빠와 내 사촌 남동생이 맨 앞에서 했고, 큰집에 가서 용돈을 따로 더 받았다. 


주변 여성 친구들도 10대 때부터 명절에 전을 부쳤다. 내 친구는 명절에 20살인 여자 사촌 동생과 남자 사촌 동생이 오자마자 여동생은 두 팔을 걷고 뭘 도우면 되냐고 물었고, 남동생은 옷 벗고 소파에 앉아 게임을 했다고 열불을 냈다. 남성 친척들은 모이면 앉아서 주식과 직장 얘기, 정치, 주변 사람들의 성공담, 결혼 얘기를 하며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그러나 여성 친척들은 부엌에서 무엇을 더 도울 수 있을지, 남은 일들은 무엇이 있는지 눈으로 보고 대화를 통해 착착 맞춰갔다. 남성들은 세상을 바라보(고자 하)나, 정작 여성들이 살피는 주변을 보지는 못했다.


결혼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다. 결혼 준비단계를 떠올리다 틀에 박힌 결혼식을 물렀다. 아리따운 흰 꽃 같은 웨딩드레스를 두 시간 동안 입고 두 시간 동안 신부 메이크업을 받고 뒤에서 누가 내 면사포를 끌어주지 않으면 꽃처럼 앉아있어야 한다니. 그것도 남편이 식장 앞에서 나 대신 내 지인들에게 인사하는 사이에 말이다. 오염되지 않음을 상징하는 하얀 드레스 위로 안타깝게도 내 어깨에는 매화나무가 쇄골 아래에는 아티초크가 새겨져 있다. “신부 몸에 저게 뭐야…”라고 속삭이는 어른들의 목소리가 벌써 면사포 아래로 아른거린다. 


결혼식을 치르지 않고도 같이 살 수 있지 뭐. 같이 집안일을 나눠 하는 장면을 떠올려봤다. 안타깝게도 저녁 분리수거장에서 “오늘도 나오셨네요” 같은 위로의 말들이 오가는 현장이 떠올랐다. 늦게 퇴근해 쉬지도 못하고 아내의 등쌀에 떠밀려 나와 힘겨운 애환이 섞인 눈빛을 교환하는 남편들의 대화가 울려 퍼졌다.  

장을 보고 무거운 걸 들고, 분리수거 하면 공평한 줄 알다니. 힘을 쓰는 것에 가치를 매기는 것 역시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50대 여성들의 손목터널증후군 현상이 많이 나타나는 이유는 집안일 때문이다. 여성들은 행주 하나 짠다고 으스댄 적 없다. 장보고 잠깐 무거운 거 들고 으스댈 수 있다는 것부터 이상하다. 살림할 때 으스대는 마음, 그게 바로 살림을 도와준다는, 살림에 자신의 중추적인 역할은 없다는 마음을 내포한다. 내 남편이 저러지 않으리라는 낙관 하기는 어려웠다.


결혼 생활에서 일사불란하게 집 안 청소의 순서와 계획, 장을 무엇을 볼지 스케줄을 고민하고 청사진을 그려보는 건 나다. 이런 엄청난 멀티플레이를 할 수 없으면서 이런 일이 별거 아니라고 믿는 남성 친척과 사촌들, 남성 친구들이 널렸다. 김치통에 김치를 채워 넣고, 음식물 쓰레기를 설거지 할 때마다 하수구 통에서 걷어내고, 청소기 필터를 갈고 주문하고, 냉장고 속 재료가 언제쯤 상하는지 고민하며 반찬을 하는 것 등. 자잘하게 시간을 좀먹는, 끝나지 않는 집안일을 해내고 신경 쓰는 건 아무래도 내가 될 것 같다. 


그렇다고 전기 밥솥 뒤 물구멍 청소는 하는지 같이 자잘한 것들을 매번 결혼하기 전에 몰래 검사할 수는 없지 않나. <공평한 살림을 위한 남편감 찾기 체크리스트> 같은 가이드라인 책을 쓰면 어떨까 생각도 해봤다. 거기엔 전기 밥솥 뒤 물통은 깨끗한지 같이 세세한 항목들이 채워질 테다. 거기서 일정 점수를 통과했다고 바로 남편감을 찾았다고 하기엔 이른 축배다. 아직 친인척, 친구, 자녀 관계 대응 서술형 모의고사가 여성, 남성 모두에게 남아있다는 에필로그를 덧붙이고 싶다. 


결혼 후 관계는 혼자서 책임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결혼은 둘 뿐 아니라 서로의 혈연, 친구 관계 등 모든 관계를 잇는 일이다. 둘이서 존중하며 연애해도, 살림을 잘했더라도, 평등한 부부 관계를 추구해나가고자 해도 복잡한 관계망 안에 들어가면 사회적인 관습으로 둘 사이를 규정하는 일들이 많아진다. 그들의 관계는 새로운 관계이고 사회적으로 통용되고 기대받는 여성의 역할 앞에서 남편의 역할은 한정적이다.


“아리따운 형수님 집들이 언제 하시나요? 음식 솜씨 한 번 보여주세요" 같은 말 앞에서 상대 입을 틀어막을 수 있을까. 아내에겐 “새아가가 살림을 야무지게 잘하네”를, 남편에겐 “홍길동 서방은 뭘 먹고 싶나”를 응원 삼지 말라고 주변 사람들 팔다리 잡고 말리긴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은데 말이다.


정말 평등해지기 위해서 주변 관계들도 함께 노력해야 하는데, 한국의 평균 성인지 감수성을 생각하면 암울해진다. 내 주변 남성들은 여성의 노동에 기대어 살고 있다. 10대 때부터 명절에 전 부치는 여성들과 20대 후반이 돼서도 엄마에게 반찬을 얻어먹는 남성들이 가득하다. 이런 사회라면 과연 결혼을 하고 싶어도 과연 할 수 있을 것인지 의심이 든다. 


가장 무서운 건 어쩌다 2세다. “결혼하지만 애는 안 가질 거야!”라고 선언하더라도 통계가 보여주는 결혼 후 출산의 압박은 무섭다. 뉴스에는 2018년 세계 처음으로 합계출생률이 한 명 아래로 떨어진 뒤 2019년 0.92명을 기록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결혼을 하고서도 출산을 안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우선 신혼부부에게 아이가 있으면 아이의 수에 따라 전세자금 대출이나 주택청약에 가산점을 준다. 그 외에도 수많은 정책이 출산을 장려한다. 2016년 기혼자의 합계출생률은 2.23명으로 집계되니 이 정도면 결혼하고서는 자녀 1명도 가지지 않는 건 웬만한 독립 투사급의 의지여야 가능한 것 같다. (이철희, 2018)


그렇게 출산을 하게 되고 나서 육아 휴직은 누가 하게 될까? 여성이 남성보다 임금을 32% 적게 받는 한국에서 평등한 부부가 경제적, 합리적 이유로 합의 아래 아내가 육아휴직을 하는 것으로 귀결하기 쉽다고 본다. 그렇게 경력단절로 이어지고, 그렇게 살아보고서야 “이야 생각보다 한국 사회 가부장적인데?”를 깨닫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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