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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삐삐 May 30. 2022

룸메이트 말고, 플랫 메이트 말고,

새로운 식구를 찾아서 4


“혼자 살고 싶어.” 


동거인은 내게 집에 들어오는 게 아닌 남의 집에 얹혀사는 것 같다 했다. 우리는 서로를 몰랐다. 각자 가닿으려는 노력은 어느샌가 언제가로 계속 미뤄져 갔다. 그날 밤 같은 방 각자의 침대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가벽을 느꼈다. 얼마나 많은 밤을 가벽이 세워진 느낌으로 룸메이트는 잠을 청했을까. 언제부터 수많은 밤을 그 가벽을 세우고 잤을까 생각했다. 이대로면 이 집 계약이 끝나고 룸메이트 얼굴을 보지 못할 것 같았다. 애써 부정했던 우리의 관계를 인정해야만 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는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다. 


룸메이트에게 애인이 생기고, 다른 친구들과의 저녁 약속, 일이 생겼다. 나에게도 그런 비슷한 일들로 스케줄러를 빼곡히 채워졌다. 한 달에 한 번 같이 밥 먹기조차 어려웠다. 가까운 동네 친구들과 곧잘 놀러 가서 맛있는 걸 고심해가며 먹었지만, 우리의 밥 한 끼는 언젠가로 미뤄졌다. 먼 거리에 사는 친구들과 만나면 온 마음을 쓰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선 우리는 진에 빠져 돌아왔다. 매일 밤 보는 사이는 함께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간으로 가득했다고 믿었기에 우리는 매일 그 시간을 일상에 찌든 얼굴을 하고선 흘려보냈다. 


매일 달라지는 하루 속에 변하는 서로의 얼굴은 조금 더 피로했지만, 어제와 비슷했고 친구를 안다고 착각이 매일 조금씩 쌓였다. 같은 방에서 자고 같은 공간에서 일하면서도 외로웠다. 친구가 없는 집이 더 편했다. “오늘 뭐했어?” 라고 물어보는게 애정과 관심이 아니라 서서히 일상을 사사건건 간섭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기 시작했다. 서로 한 공간에 있는 것 자체가 개인 시간에 대한 공동 거주자의 침해로 여겨지는 순간들이 쌓였다. 백 명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보다, 처음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보다 같이 사는 룸메이트에게 말을 거는 것이 더 어려웠다.


피터팬의 집 찾기에서도, 학교 커뮤니티에도 룸메이트를 찾는 글은 넘쳤고, 룸메이트를 찾는 친구들은 많았다. 그렇게 월세를 나누고 더 좋은 환경에서 살기 위해 여러번 더부살이를 했지만, 다들 비슷한 전차를 밟았다. 딱 부동산 계약 기간 만큼만 얽혀있었고, 우리는 언제나 이별을 준비했다. 네 것과 내 것이 명확했다. 수저도, 그릇도, 락앤락들도. 새로 사는 물건은 매번 누가 언제 가져가게 될지 이야기했다. 섞여 살았지만, 그 모든 걸 다시 솎아낼 수 있었다. 서로의 삶에 그 어느 책임도 묻지 않아도 됐다. 


그러나 결혼할 수 없는 존재인 내게 같이 산다는 의미는 경제적인 이유를 넘어선다. 같이 사는 사람에게 공간이 주가 되는 룸메이트라는 이름, 플랫 메이트라는 호칭을 붙이면서 살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거창하게 공동체를 만들어서 따로 동네를 만들고 싶지도 않다. 연인과 치열하게 싸우고 사랑하는 것처럼, 나는 서로를 아낄 수 있는 사람과 다름을 알아가며 치열하게 이해하고 싶다. 아주 철저히 엮이고 녹아들고 싶다. 그러다가 가슴 아프게 헤어지는 것처럼 함께 사는 사람과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가구도, 생활비도, 생필품들도 다 섞여서 서로 집을 나누게 될 때 이혼하는 것만큼의 고통과 시간이 드는 그런 관계를 원했다. 서로의 이별을 정해두며 살지 않고, 더 언제든 이어나갈 수 있는 삶의 연속성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그런 사람. 내게 필요한 건 식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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