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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삐삐 Jun 02. 2022

스스로 일으켜 세우는 한마디 "왔어?"

선택한 식구 2


죽고 싶다. 잠에서 깨면 엊저녁에 날 삼키려 들었던 천장에 지겨운 햇빛이 다시 들었다. 지구가 해를 향해 도는 동안 나는 꿈속에서 악바리를 썼다. 매일 그렇게 읊조리며 피로한 눈을 떴다.  

그날의 꿈은 유달리 생생했다. 죽고 싶다는 말 조차도 나오지 않았다.  


오늘 꿈에서 데이트폭력범과 재결합했다. 나는 다시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었다. 그는 즉석에서 식당 냅킨에 그림을 그렸다. 그 이상한 작은 낙서를 내 몸에 새기자고 했다. 내가 어떻게 거절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사이에 이미 그는 내 몸에 문신을 새기기 시작했다. 나는 그 문신을 그리자마자 후회했다. 문신은 내가 처음에 알던 것보다 서서히 더 괴기하게 변했고, 내가 아는 것보다 크기가 점점 더 커졌다. 나무가 아니었던 도안이 나무가 되어 나뭇가지는 등 뒤로 이어졌다. 가지에서는 무수히 많은 손이 삐쳐 나오고 있었다. 끝에는 내 몸 전체를 덮어가며 상체 전부를 덮는 지경까지 가서 엄마에게 숨길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후회하며 문신을 지워야겠다, 얼마나 힘들까, 돈이 얼마나 들까 고민을 하고 다음 날 일어났는데 내 얼굴엔 멍이 반쯤 눈 주위로 시퍼렇게 들어있었다. 나는 왜 눈에 멍이 들었는지 알지 못했다. 어제 내가 눈을 너무 세게 비볐나. 그거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내가 친구들에게 데이트 폭력범과 재결합 했다고 이야기했다. (일기 중)


우울증은 내가 버텨왔고 지나왔던 모든 과거가 여전히 내 것이라고 말했다. 연골이 바닥에 끈적하게 녹아내린 것 같은 몸을 어쩌지 못해 앉았다 눕기를 반복했다. 내 밥 한 끼 제대로 먹지 못했고, 안 좋은 음식들로 내 몸을 잔뜩 파괴하고 싶지만, 그렇게 사 먹을 기운조차 없었다. 집사람이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왔어?” 


그 한 마디가 날 이끌어 세웠다. 그 말을 건네고서는 뭉그적거리며 집사람의 얼굴을 보러 방문을 열었다. 내가 널브러뜨린 잔해를 치우기 시작했다. 별거 아닌 말들이 “화장실 휴지 좀 가져다줘” 같은 일상적인 말들이 날 일으켜 세우고 견디게 했다. 하루하루를 망가트리지 않고 살아가게 했다. 


우리의 삶이 있어 내 삶이 이어졌다. 돌아와 날 기다리고 있을 집사람이 있었기에. 가벼운 우울감도, 깊은 우울도 “왔어?”라는 말로 일으켜졌다. “왔어?”라고 묻기 위해 악을 쓰지 않아도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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