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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삐삐 Jun 17. 2022

같은 지붕 아래, 혼자였던 순간이 있나요?

선택한 식구가 있어도 4


장소에는 감정이 묶여 있다. 우리가 회사, 학교로 향할 때 대중교통 안에서 반복적으로 느끼는 감정은 장소에 축적된 감정이다. 


어린 시절 내게 집이라는 공간은 외로움으로 각인되어있다. 팔 년 동안 왕따를 당했던 시절, 학교는 불안한 공간이었다. 그 누구도 쳐다보고 있지 않은데 나는 모두에게서 눈치를 봤다. 그렇게 하루 종일 불안한 공간을 벗어나 도어락으로 집의 침묵을 깨고 들어왔다. 이어서 집안의 적막을 깼던 건 언제나 TV의 밝은 기계음이었다. 그렇게 세 시간, 네 시간 TV에 눈을 고정하고 있다 보면 언니가, 조금 뒤엔 엄마가 왔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잘 이야기하지 않았고, 하더라도 부분만 이야기했다. 가족들 앞에서 씩씩한 척 가면을 썼다. 가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소리 죽여 울었다. 방문 밖에는 가족이 있었지만, 아무도 몰랐다.


고향 집을 떠나고 외로움이라는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혼자 살면서도 친구와 함께 살면서도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쉽게 공간에 들러붙었다. 애인도 식구를 찾아다녔지만 내 외로움이 끝나는 것과 동일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 사람이 나를 더 외롭게 만들기도 했다. 아니, 외로움을 누군가로 인해 떨쳐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날 더 외롭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끊임없이 식구를 찾는다. 내가 늙었을 때, 요양병원에 누워서 사회복지사들에게 내 죽음의 끝을 맡기고 싶지 않다. 인간의 죽음이라는 고독은 결국 혼자 감내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삶까지 고독하라는 법은 없다. 함께이기에 죽음의 의미도 내 존재 의미도 고민하고 찾을 수 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나를 가장 외롭게 할지라도, 그들은 나를 다시금 세상으로 끄집어낸다. 외로워도, 싸우더라도, 비이성적이더라도, 아무튼 식구가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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