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구와 살면서 4
“두 사람은 n, 300원, 한 사람은 n, 400원을 내면 되네.”
두 사람은 모두 내 계좌로 n, 300원을 보냈다. 친구들 사이에 고작 100원에 때문에 속상했다.
그날 모임에 늦게 합류한 나는 맛만 겨우 본 식사를 나눠 냈다. 기꺼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친구 둘이 내게 100원까지 계산하고 있는 걸 보니 낸 돈이 너무 아까웠다. 100원이라도 손해 보고 싶지 않은 그 마음이 서운했다. 공평 하고자 하는 마음 안에는 계산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때의 100원은 돈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고맙다는 말, 잘 먹었다는 한마디, 100원쯤 더 내도 상관없다는 그 마음이 괜히 다음번에 뭔가 라도 조금 더 해주고 싶게 만든다. 반대로 공평해지고 싶을수록 조금 더 할 수 있었던 일도 괜히 손해 보는 것처럼 느끼게 했다.
집안일도 마찬가지였다. 정교하고 완벽하게 집안일을 나눌 수 있다는 믿음이 서로를 더 치졸하게 만들어갔다. 계속해서 집안 회의를 하고 카톡으로 부탁해도 집안일은 예측하지 못한 부분에서 계속 나타났다. 우리가 약속하지 않은 노동을 하는 것은 매 순간 저울추를 기울이는 일이 되었다. 한순간 살짝 저울추가 기울면 다시 정교하게 맞춰야만 할 것 같았다.
그렇게 ‘공동의 공간을 위한 노동’은 각자 해내야 하는 ‘임무’로 변해버렸다. 물론 집안 회의에서 일을 나누는 게 ‘어느 정도까지는’ 집안일의 양적 평등을 맞춰가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계산기가 각자 누구에게 100원을 더 내야 하는지 이야기해 주지 않듯, 체크리스트도 누가 더 어떠한 순간에 집안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지 고려하지 못했다.
이제는 고마워할 틈이 없는 정교한 공평함에서 벗어나 조금 더 고맙다고 말할 수 있는 틈을 비워 놓는다. 조금 더 고마워하고 조금 더 채워주는 우리를 만들어가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