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삐삐 Jun 26. 2022

선을 넘는 식구

식구와 살면서 5 


같이 살아가기 위해선 나를 지킬 수 있는 선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그 선은 나와 집사람을 배타적으로 가르는 선이 아니다. 온전히 나를 위해서 시간을 쓰는 것보다, 동거인을 위해서 쓰는 시간이 때로는 나를 지키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나 혼자였다면 오히려 노동이었을 일이 식구를 위해 할 때 되려 나를 위한 일이 되기도 했다. 그렇기에 나 혼자였다면 먹지 않았을 음식을 동거인을 위해 준비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여름날 한강 둔치에서 풀꽃을 꺾어 마루에다가 꽂아둘 수 있었다. 

식구가 되어간다는 건 선은 건드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의 선을 끊임없이 부수고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지금 동거인 역시 나의 깨끗함의 기준을 희미하게 만들어가는 존재다. 마리는 고양이 4마리, 강아지 한 마리의 엄마다. 마리의 집안일의 순위는 그들이다. 그들의 밥을 주고, 씻기고, 산책을 시키고 나면 다른 집안일을 할 시간이 부족하다. 그래서 그들의 털 청소, 바닥 청소, 그 외의 집안일을 한다. 나의 깨끗함의 기준을 마리에게 강요할 수도 없고, 나도 일정 시간 이상 집안일에 할애하기 힘듦으로 예전보다 집의 깨끗함의 유지 정도는 좀 낮아졌다. 


동시에 마리 역시 자신의 선을 넘기 위해 노력한다. 내 청소 기준에 맞춰 조금 더 움직이려고 한다. 함께 있는 공간을 더 아늑하게 꾸며가는 것, 마리의 공간이었던 곳을 함께 있는 곳으로 바꿔 가는 것에 고맙다고 말하며 무엇인가를 더 해보려고 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끝없이 서로가 자신을 지킬 수 있도록 서로의 선을 포개어가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100원 더 내서 서운했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