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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삐삐 Oct 08. 2020

결혼은 같이 살아봐야 알아

가족이 이런 거라면, 난 결혼 안 할래 1


결혼을 선택하는 시대가 되고서부터 전해져 온 말이 있다. “결혼은 살아봐야 안다.” 불확실성을 가장 무서워하는 현대인에게 이토록 무서운 말이 구전되다니. 아마도 기혼자들의 진심이 한몫했나 보다. 결혼이란 살아가는 매 순간 서로가 바뀌는 존재라는 걸 온몸으로 살아내며 전했을 말일 테다.


살아낸 자들의 이야기는 강력한 힘을 가진다. 우리 엄마는 ‘살고 보니’ 케이스 중에서도 가장 하드코어 한 사람과 결혼했다. 엄마의 역사는 살아봐야 아는 그 일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일, “결혼하니 사람이 변하더라” 케이스다. 혼인 신고 도장을 찍고 났더니 사람이 변한 것이다. 내 아비는 엄마를 극진히 대접했다. 멋있고, 젠틀한 사람이었다. 딱 결혼하기 전까지. 결혼 직후 아비는 180도 태도를 바꿨다. 아비는 돌싱이었다. 엄마는 미혼이었고, 8살 어렸고, 안정적인 중학교 선생님이다. 누가 봐도 아비는 엄마와 결혼이 급했고 잘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엄마는 가부장적인 집을 떠나 결혼했다. 결혼 후 아비는 바람, 경제적 갈취, 아내 구타를 일삼았다. 맨 처음 아비는 엄마를 때리고 다음날 사과를 했다. 다시는 그러지 않는다 했다. 그런 말을 믿으며 6년을 살아갔다. 그 거짓말은 갈수록 심해졌고, 아비는 나를 밴 엄마를 발로 걷어찼다. 그 일을 계기로 엄마는 이혼을 결심했다. 내가 1살 때 엄마는 이혼했다. 그렇게 잘못 많이 저지른 아비라도 국가는 언니와 나의 양육권을 가지게 해 줬다. 그 아비는 8개월 만에 3번째 결혼을 했고 키우기 힘들다며 1년도 안되어 언니와 나를 엄마 손에 돌려보냈다. 

결혼을 낭만으로만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요즘 세대에 결혼을 고민하는 이들은 결혼식은 올리되 혼인신고를 미뤄보거나, 혼전동거를 시도해보기도 한다. 결혼을 이야기하며 같이 살기 전에 살림, 라이프 패턴을 알아가고 약속도 세워본다. 그러나 아무리 대책을 세워놔도 그건 예상 목차일 뿐이다. 같이 살며 상상에도 없던 일들이 일어나고 대책에도 없던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 


둘이서 존중하며 연애했어도, 결혼은 둘이 하는 게 아니라 서로의 혈연, 친구 관계와 이어지는 일이다. 어느 정도 관계가 보장된 사이(여기서는 혼인)에서는 평등했던 관계에 주변인들이 더해지는 순간 기존의 사회의 저울추에 따라 기울어지기 쉽다. 둘 사이의 평등을 아무리 노력해도 사회의 관습적 기울어진 기대에서 내려오기 어렵다. “아리따운 형수님이 집들이를 위해 한 상 차리셨네요” 같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내에겐 “새아가가 살림을 야무지게 잘하네”를, 남편에겐 “홍길동 서방은 뭘 먹고 싶나”를 응원으로 삼지 말라고 주변 사람들 팔다리 잡고 말리긴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결혼하지만 애는 안 가질 거야!”라고 생각하기에는 통계가 보여주는 결혼의 실상은 무섭다. 한국 기혼 여성의 출생률은 2000~2016년 통계청 자료를 분석해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2016년 기준으로 2.23명이다. 2020년 현재 평균 출생률은 0점 대지만 기혼 여성들의 출생률은 1점 후반대다. 결혼해서 자녀 1명도 가지지 않는 건 독립 투사급이라는 농담도 있다. 결혼하며 살다 보니 아이를 낳고, 며느리가 되고 그렇게 그렇게 살아보고서야 “이야 생각보다 한국 사회 가부장적인데?”를 깨달아야 하는 것일까. 


현대인으로서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감은 나도 크다. 그러나 내 불안을 배우자 한 명에 기대어 불확실성을 메우기엔 결혼 역시 큰 불확실성을 가지고 있는 일이다. 적어도 내 인생의 운전대를 남이 잡게 하진 않으리라. 차라리 내 조수석에 마음 맞는 사람들을 가끔 상황 따라 태우던지, 내 운전대를 내려놓고 히치하이킹을 하다 내리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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