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숙영낭자 Aug 18. 2016

별이 대답했다

오늘도 고마워요

                                                                                              

                                                                                                                      

페르세우스 유성우가 쏟아진다는 밤이다. 

밤 10시부터 새벽 3시까지 어디서든 맨 눈으로도 관측할 수 있다는 뉴스를 보았지만 

내가 사는 곳은 밤에도 불빛 찬란한 도시고 밤 10시부터 새벽 3시는 아이와 함께 깊이 잠들어야 하는 

시간이기에 나는 일찌감치 별 보기를 포기했다. 


최근 남편은 일주일에 이삼일은 지인들과 술 약속을 잡았다. 

이날 밤도 예외는 아니었다. 

술 약속 이야기를 낮에 들었을 땐 '또 오늘도 늦겠군' 싶어 속으로 한숨이 났다. 

"술 너무 많이 먹지 말고, 너무 늦게 들어오지 마."

소용없다는 걸 안다. 

"그래, 늦게 들어오는 건 상관없어. 술만 많이 마시지 마."

"알았어."

그렇게 몇 번이고 확인, 다짐을 받았더랬다. 


그날 밤, 문득 잠에서 깨어 시계를 보니 새벽 3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남편은 보이지 않았다. 

너무 화가 났다. 이 시간까지도 술 먹고 있는가 싶어서 카톡으로 집에 안 오냐고 날렸더니 전화가 온다. 

이미 술에 취해 꼬부라진 혀로 횡설수설... 

낮에 나와했던 약속은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구나. 아주 마누라 말은 씹어버리는 껌이구나. 

집에 들어오지도 말라고 매몰차게 전화를 끊고선 두 번인가 이어진 남편 전화를 일부러 받지 않았다. 

너무 화가 나 좋은 말이 안 나갈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잠시 숨을 고르면서 침대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다. 

달은 유난히  밝고, 군데군데 고요하게 반짝이는 별이 눈에 들어왔다.

이 새벽에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도 오랜만이네.

가만, 페르세우스 유성우가 떨어진다는데... 역시 여긴 도시라 잘 안 보이는구나. 


그러다 문득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의 한 글귀가 떠올랐다.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이란 다름 아닌 '지구'다. 

(그가 쏘아 올린 '보이저 1호'가 1990년에 해왕성과 명왕성 궤도 밖에서 지구를 찍은 사진을 보내왔는데, 

정말 희미하게 작은 점처럼 반짝거려서 '창백한 푸른 점'이라고 부른다)


창백한 푸른 점


"이 빛나는 점을 보라. 그것은 바로 여기, 우리 집, 우리 자신인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 아는 사람, 소문으로 들었던 사람, 그 모든 사람은 그 위에 있거나 또는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기쁨과 슬픔, 숭상되는 수천의 종교, 이데올로기, 경제이론, 사냥꾼과 약탈자, 영웅과 겁쟁이, 

문명의 창조자와 파괴자, 왕과 농민, 서로 사랑하는 남녀, 어머니와 아버지, 앞날이 촉망되는 아이들, 

발명가와 개척자, 윤리 도덕의 교사들, 부패한 정치가들, 슈퍼스타, 초인적 지도자, 성자와 죄인 등 

인류의 역사에서 그 모든 것의 총합이 여기에, 이 햇빛 속에 떠도는 먼지와 같은 작은 천체에 살았던 것이다. 

지구는 광대한 우주의 무대 속에서 하나의 극히 작은 무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조그만 점의 한 구석의 일시적 지배자가 되려고 장군이나 황제들이 흐르게 했던 유혈의 강을 생각해 보라. 

또 이 점의 어느 한 구석의 주민들이 거의 구별할 수 없는 다른 한 구석의 주민들에게 자행했던 

무수한 잔인한 행위들, 그들은 얼마나 빈번하게 오해를 했고, 서로 죽이려고 얼마나 뛰고, 

얼마나 지독하게 서로 미워했던가 생각해 보라."


-칼 세이건 <창백한 푸른 점> 1장 '우리는 여기에 있다' 중에서 


저 사진 속 파란 원이 우리가 사는 지구. 

지금 내가 맨 눈으로 올려다보는 밤하늘의 저 별도

60억 km 밖에서 지구보다 더 크고 찬란하게 빛나는 별 일지 모른다. 

이 넓고 넓은 우주에서 인간의 존재란 얼마나 하찮은가?

그 하찮은 인간이 하는 다툼이란 또 얼마나 더 하찮은가?  시간이 지나면 다 잊히고 무의미해지는 일인데. 

결국 칼 세이건의 메시지는 '평화와 사랑'이다. 이 거대한 우주 속, 한낱 점에 지나지 않는 지구에서

인간끼리의 다툼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따뜻하게 대해주어야 한다는 그의 말... 

그 말을 곱씹고 있을 때, 정말 거짓말처럼 왼쪽 밤하늘에서 섬광처럼 유성우 하나가 떨어졌다. 

아주 선명하게 은빛으로 빛나며 슈욱~ 사선을 그리며 순식간에 사라진 찰나의 별. 

마치 나의 생각에 대답이라도 하듯, 내 생각이 맞다는 듯

별은 그렇게 내 눈에 박히고 사라졌다. 


본격적으로 유성우가 떨어지나 싶어서 창문을 열고 목이 아프도록 하늘을 올려다봤지만

그 뒤로는 단 한 개의 유성우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나는 이미 우주의 대답을 들었으니. 

방금까지도 심란함과 분노에 널뛰던 내 마음은 놀랍도록 차분해지고 평화가 찾아왔다. 


그렇게 30분이 지났을까?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남편이 집에 들어왔다. 

막상 남편의 얼굴을 보니 또 화가 치민다. 아, 인간은 얼마나 유치하고 옹졸한 존재인가. 

정말 우주의 티끌보다 작은 존재라 그런가, 마음이 이토록 좁을 수가 없다. 

별의 대답대로라면, 나는 저 인간을 따뜻하게 대해주어야 한다. 그래, 그렇게 하자. 

그래도 저 인간 덕분에 이 시간에 유성우를 봤으니. 고맙다. 


미안해서 바로 눕지도 못하고 침대 모서리에 어정쩡하게 앉아서 내 눈치만 보고 있는 남편을 보자니

속으로 웃음이 났다. 그래, 그래도 이렇게 들어와 줘서 고맙다.

이 작은 별에서 우리라도 싸우지 말자. 

나는 남편을 등 뒤에서 안아주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물건을 버리면 게으름도 버려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