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위에서 뛰는 아이, 노심초사하는 엄마
아침에 일어나니 온 세상이 하얗다.
그동안 우리 가족이 사는 곳에는 눈이 찔끔찔끔 와서 겨울이 되면 눈이 온다고 믿었던 아들 녀석이
적잖이 실망했던 터...
"희운아, 눈 왔다!"
평소 같으면 아침잠의 늪에 빠져있을 녀석이 그 소리에 금세 일어난다.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장갑도 스스로 찾아 끼고 겨우내 신을 일 없었던 부츠도 꺼내 신는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순결한(?) 눈길 위에 제 발자국을 찍어가며 걷는 재미란!
눈을 뭉쳐서 제 아빠 엄마 엉덩이에 던지며 신나 하는 녀석의 표정을 보니 절로 미소가 번진다.
하얀 눈이 쌓인 돌 위에 손가락을 푹 찍어 이름을 쓰고
꼬마 눈사람도 만들어 손바닥 위에 올려준다.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는 또래 아이들을 만나니 녀석은 더욱 신이 났다.
눈싸움은 역시 친구들과 함께 해야 제 맛이다.
어린 자녀를 키우는 부모라면 그런 웃음소리를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정말 신나고 즐거울 때 나오는, 끼약~ 비명에 가까운 그 특유의 웃음소리를.
그런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만들어내는 눈 오는 날 아침의 흥을 깨는 한 엄마가 있었다.
"OO아, 눈 그만 만져. 손 시려."
우리 아이와 같은 나이,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한 여자아이의 엄마다.
알고 보니 OO이는 장갑도 안 끼고 나왔다. 엄마의 말에 눈을 만지려던 아이가 주춤한다.
OO이가 친구들처럼 눈을 만지고 싶어 하자 할 수 없이 집으로 장갑을 가지러 간 OO엄마.
그 사이 OO이는 친구들과 마음껏 뛰며 깔깔거렸다.
늘 아침마다 어떤 이유에 선지 표정이 새침하게 굳어있던 아이였는데
그렇게 밝게 웃는 표정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OO아, 그렇게 뛰지 마. 넘어져."
"OO아, 거긴 가지 마, 위험해."
"OO아, 누가 거기 올라가래? 미끄러워."
장갑을 끼고 나서 이제야 좀 눈을 만지며 친구들과 어울리려던 OO이는
수도 없이 엄마의 제동에 멈칫멈칫해야 했다.
"언니, OO이 안 넘어져요. 아까도 얼마나 잘 뛰어다녔는데요."
내가 OO 이를 두둔했지만 OO이 엄마는 여전히 못 미더운 눈빛으로 딸을 바라봤다.
결국 OO이는 친구들 따라서 야트막한 언덕길(그곳은 눈이 쌓이지도 않은 곳이었다)을
올라가려다 또 엄마의 잔소리를 들었고, 엄마 옆으로 오라는 말에 가기 싫다고 도리질을 한 번 했다가
엉덩이 한 대 세게 맞고 구석 자리에 가서 꾸중을 들어야 했다.
OO이가 혼나러 간 사이 다른 유치원의 한 엄마는 무릎까지 오는 긴 부츠를 신은 아이에게
'신발에 눈 들어가니 눈 밟지 말라'는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아이는 신나게 눈발자국을 찍다가 엄마의 눈치를 보며
실망한 표정으로 유치원 버스에 올라탔다.
그 사이 우리 유치원 버스가 도착했고, 제대로 놀지도 못한 OO이는 굳은 표정으로 버스에 탔다.
일찍 나와 놀만큼 논 우리 아들 녀석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손을 힘차게 흔들었다.
뽀득뽀득 눈길을 밟노라니 어린 시절의 추억 한 토막이 떠오른다.
겨울방학 때 사촌언니, 동생과 함께 외갓집 앞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함박눈을 맞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음껏 놀았던 그 반나절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눈만 오면 선명하게 떠오를 정도로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이다.
우리는 발목까지 쌓인 눈 위에 그대로 풀썩 누워보기도 하고,
누운 채로 양 팔과 다리를 움직여 천사 모양을 찍어내며 깔깔거렸다.
그러다 눈사람을 만들자고 셋이서 의기투합했는데 나중엔 눈덩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서
우리가 다니는 곳에 길이 날 정도였다.
그때 만약 옆에서 엄마나 이모가 "얘들아, 그건 안 돼, 위험해, 하지 마"라고 간섭을 했다면 어땠을까?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운동장에 서서 '우리 이대로 뒤로 자빠져볼까?'라고 사촌 언니가 말했을 때
나는 '그러다 머리 다치면 어떻게 해?'라고 걱정했고
사촌 언니가 보란 듯이 시범을 보였을 때에야 나랑 사촌동생이 따라서 누웠다.
그때 우리를 지켜보는 어른들은 아무도 없었지만 우린 우리끼리 안전하게 노는 방법을 생각해냈고
위험한 일 따윈 일어나지 않았다.
나의 경험에 비춰보건대, 아이들은 어른들의 생각보다 현명하다.
자기 자신을 보호할 줄 안다. 그건 본능이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지나치게 간섭만 하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좀 더 주도권을 갖고 자기들끼리 즐겁게 놀 수 있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될 것이다.
아이가 맨손으로 눈 좀 만지면 어떤가? 그럼 눈이 차갑다는 걸 알게 될 텐데.
아이가 눈길에서 좀 미끄러지면 어떤가? 그냥 툭툭 털고 일어나면 그만인 것을.
오히려 일부러 미끄러지면서 깔깔 웃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녀석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남편은 OO이 엄마를 보며 안타까워했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이를 너무 통제하고 간섭하는 것 같아.
OO이 엄마 아빠, 아직도 OO 이를 세발자전거 태워?"
"아마 그럴걸?"
또래 아이들이 서너 살 때쯤 12인치 두 발 자전거로 시작해 14인치, 16인치 두 발 자전거로
갈아타는 동안 OO이 혼자만 아기 때 쓰는 세 발 자전거를 타고 다녔더랬다.
재작년 어느 여름 날인가... OO이가 놀이터에서 신나게 자전거를 타는 우리 아이를 보고
저도 타보고 싶어 하기에 태웠더니 의외로 너무 잘 타는 게 아닌가?
그래서 내가 OO이 엄마한테 우리 희운이가 타는 자전거를 선물로 줄 테니 한 번 태워보는 게
어떠냐고 했다. OO이 엄마의 반응은 단호했다.
"안 돼요. 그 자전거 타고 언덕길이라도 내려가다 다치면 큰일 나게요."
"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그 뒤로 다시는 자전거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내 아이를 다치지 않게 보호하고 안전하게 지켜주는 건 부모의 당연한 의무이지만
그게 너무 지나쳐 아이의 놀이를 방해하게 되는 건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아이를 보호하는 것만큼이나 지켜줘야 할 게 바로 아이의 놀이 욕구다.
아이들에게 놀이는 생존이나 다름없는 중요한 활동이기 때문이다.
유난히 잔병치레가 잦고 6살 아이답지 않게 우울해 보이는 OO이도
어쩌면 엄마의 지나친 통제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 건 아닐지...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