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몰랐던 내 아이의 마음
"어, 어, 어, 어, 엄마. 이거 봐."
"그, 그, 그게 아니라 자, 자, 자, 자꾸 그러면 내, 내가..."
큰 애가 말을 더듬기 시작한 건 둘째가 태어나고 두 달 정도 지났을 때부터였다.
그때가 유치원에서 6세 반으로 진급하던 시기와 맞물렸기 때문에 나는 크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나름 스트레스를 받나 보다 하면서.
담임 선생님께 말 더듬는 증상에 대해서 상담했더니 선생님은 짐짓 모르는 체 하고 넘어가면 저절로 사라질 거라면서 큰 걱정 하지 말라고 얘기해주셨고,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지켜보기로 했다.
하지만 말 더듬는 증상은 쉬 사라지지 않았고 급기야 최근에는 오른쪽 눈을 계속 깜빡이는 증상까지 더해졌다.
안 그래도 눈이 나쁜 애가 왜 갑자기 눈을 자꾸 깜빡이는 건지, 혹시 눈에 무슨 이상이라도 생긴 건지 걱정스러워 이것저것 묻자 아이는 도리질만 할 뿐이었다.
"나, 나도 모르겠어. 그, 그, 그냥 저절로 누, 눈이 깜빡깜빡해."
눈이 아픈 것도 아니고, 속눈썹이 눈을 찌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저절로 눈이 깜빡여진다니...
안과에 갈 문제는 아닌 듯했다.
특정한 행동이 이유 없이 반복되는 증상... 혹시 틱 장애가 온 건 아닐까? 덜컥 겁이 났다.
아는 엄마에게 고민을 털어놓자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거, 아이 마음이 아픈 거야. 우리 애도 그랬어. 우리 애는 양쪽 눈이 다 깜빡깜빡 거리고 나한테 말도 제대로 못했어. 그래서 심리치료받으러 다녔잖아, 나랑 애랑 같이."
티 없이 밝게 제 엄마에게 개구리 잡았다고 보여주는 아이를 보니, 심리치료까지 받으러 다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아이가 저렇게 좋아지게 된 비결이 뭘까?
"아이 마음을 읽어줘야 해."
"마음을 읽어준다고?"
"예를 들어서 '우리 OO이가 엄마랑 같이 놀고 싶었는데 엄마가 안 놀아줘서 속상했구나.' 하면서 아이의 기분과 감정에 공감해주는 거지."
뭔가 특별한 비법이랄 것도 없이 이미 내가 알고 있던 방법이었다.
하지만 둘째를 낳고 나서 희운이에게 그걸 해준 적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이제 형이 되었다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넓혀놓고 대부분 명령조로 말했던 것,
말을 안 들으면 큰 소리로 화를 내고 '너 그러면 맞는다'는 식으로 겁박한 것,
그러면서도 녀석이 뭔가 나에게 부탁하면 '지금 OO이 젖먹이고 있어서 안 돼. 지금 OO이 씻기고 있으니까 혼자 해.'라는 식으로 들어주지 않은 것....
그동안 희운이에게 했던 나의 잘못된 행동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녀석도 6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인데 얼마나 스트레스가 심했을까...? 너무나 미안했다.
그날 밤, 녀석과 오랜만에 마주 보고 누워 마음 읽어주기를 시도했다.
"그동안 엄마가 희운이랑 잘 놀아주지도 않고 엄마 말 안 듣는다고 자꾸 혼내서 속상했지?"
그러자 녀석이 갑자기 두 손으로 눈을 비비기 시작한다. 왜 그런가 싶어서 보니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고 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나의 다정한 말 한마디가 얼마나 고팠을까?
"에고, 우리 희운이가 그동안 엄마한테 쌓인 게 많았구나. 엄마가 많이 미웠구나."
내가 다독다독하자 녀석은 차갑게 한 마디를 뱉었다.
"엄마한테는 미움밖에 없어."
녀석의 마음이 생각보다 많이 닫혀있다는 걸 알고 적잖이 놀랐다.
마음을 열어주려고 더 대화를 시도했지만 녀석은 졸리다는 말로 돌아누웠고
그날 밤의 대화는 그게 끝이었다.
엄마한테 사랑은 남아있지 않고 미움밖에 없다는 그 한 마디가 비수처럼 가슴에 박혀서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내내 나를 괴롭혔다.
그동안 말을 더듬었던 것도, 눈을 이유 없이 자꾸 깜빡였던 것도
모두 마음이 아파서 그랬던 것임을...
상처받은 마음을 읽어달라는 아이의 신호였던 것임을 모르고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고 병원에 가려고 했던 나의 어리석음을 반성하고 또 반성했다.
나의 생각을 남편에게 말하고, 희운이랑 함께 있을 때는 지금보다 더 신경 써서 많이 놀아주고
따뜻하게 대해주기로 다짐했다.
그래서 우리는
밤에 잠들기 전에는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고
주말 낮에는 아이를 거꾸로 들고 빙글빙글 돌고
아이가 원할 때는 녀석을 등에 매달고 호랑이처럼 어흥 어흥 하고
틈날 때마다 둘째에게 하는 것만큼 뽀뽀를 해준다.
뽀뽀를 하면서 또 깨달았다. 그동안 녀석에게 스킨십이 너무 부족했던 것을.
아이는 여전히 말을 더듬고 눈을 깜빡이고 있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언젠가 다시 들을 수 있겠지. 녀석이 우리에게 자주 했던 그 말,
"엄마, 아빠 사랑해. 세상에서 제일 제일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