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숙영낭자 Jan 07. 2016

안과에 간 날, 절망과 희망

오늘도, 고마워요 

"아이가 몇 살이죠?"

"네 살이요."

"이 나이에 이렇게 눈이 나쁜 아이는..."

의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낮게 한숨을 쉬었다. 나는 긴장으로 숨죽이며 의사의 말을 기다렸다. 

"시력이 0.1도 안 돼요. 아이가 네 살인데 벌써 눈이 이러면... (한숨)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 안질환에 시달릴 확률이 매우 높죠. 

망막박리의 위험도 있고요, 백내장, 녹내장이 일찍 올 수도 있고...."

의사의 뒷 이야기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이제 겨우 네 살인 아이의 미래가 어쩌면 실명으로

어이 질지도 모른다니... 절망이란 게 이런 걸까? 


아이의 눈이 나쁠지도 모른다는 건 어린이집 활동 사진을 보면서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혼자만 허리를 숙이거나 고개를 바짝 갖다 대고 활동하는 모습이 대부분이었으니까. 

결정적인 건 가을에 했던 영유아 정기검진 때였다. 

소아과에 간이 시력검사표가 있었는데 숫자나 그림을 하나도 맞추지 못하는 거였다. 

바짝 앞에 서서야 겨우 맨 위의 큰 그림만 맞추는 걸 보고 나서야 황급히 안과 예약을 잡았고, 

지난 11월에 일산에 있는 유명 안과병원을 찾아서 정밀검사를 했었더랬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또래 아이들이 0.6에서 0.8까지 나온다면 우리 희운이는 불과 0.08. 

내가 결혼 전에 시력교정술을 받을 때 시력이 0.1인가 그랬었는데...

이렇게 어린 나이에 고도근시 판정이라니. 

당장 그날로 안경을 맞추고, 한 달 정도 착용한 뒤 경과를 보자는 말을 듣고

무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왔다. 

두꺼운 렌즈를 몇 번이나 압축해서 만든 무거운 안경을 잠들 때 빼고는 하루 종일 쓰고 있어야 한단다. 

쓰기 싫다고 칭얼대는 아이를  달래 가며 씌운 후에 겨우 밤에 안경을 벗겨주면, 

아이의 콧잔등에 찍힌 안경 자국에 마음이 짠했다. 


나도 7살 때부터 안경을 썼다. 두꺼운 렌즈 탓에 눈은 바보처럼 보였고, 

학교에 다니면서는 '안경잡이'라며 놀림도 많이 받았다. 

전교생 통틀어 안경을 쓴 아이는 나밖에 없었으니... 

놀림받고 온 날에는 가방을 팽개쳐두고 방에 엎드려 한참 울기도 여러 번이었다. 

지금이야 안경 쓴 아이들이 워낙 많으니 우리 아이는 그런 놀림까지야 받지 않겠지만 

안경이 주는 불편함은 어쩌나? 

의사 선생님은 눈이 나쁜 건, 절대 유전이 아니라며 부모가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강조했지만 

아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도저히 떨쳐지지가 않았다. 


그렇게 안경을 씌우고 한두 달이 지났을까...? 2차 검진 날이 왔다. 

그동안 시력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좋아졌을까? 아님 더 나빠졌을까?

의사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 긴장과 걱정, 불안으로 마음이 뒤숭숭하기만 했다. 

드디어 아이의 이름이 호명되고... 아이의 눈이 어떤지 우리가 먼저 묻기도 전에 

의사 선생님이 먼저 우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안경 쓰고 아이의 태도가 더 활발해지고 자신감이 붙었나요?"

음... 생각을 더듬어본다. 확실히 태도가 더 좋아지긴 했다. 더 똘똘하고 야무져졌다고 할까?

예전엔 뭔가를 가리키면서  보여?라고 물으면 아이는 그런 거 묻지 말라고 짜증을 내곤 했는데

그런 행동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의사 선생님은 우리의 말을 듣더니 그거면 됐다고 흡족해하셨다. 

실제로 아이의 눈은 아주 약간이긴 하지만 시력이  지난번보다 더 좋아지기도 했고, 

무엇보다 자신감을 갖고 살다 보면 나중에 0.5, 0.7, 1.0까지도 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면서

우리를 격려해 주셨다. 

아, 얼마나 다행인지! 저절로 감사하다는 말이 나왔다. 

"지난번에 아이한테 안경 쓰라고 했을 때는 세상이 무너진 것 같았죠? 

하지만 어때요? 세상, 안 무너지죠?"

의사 선생님의 말에 나도 여유 있게 대꾸했다. 

"실은 안경 쓰라고 했을 때도 세상 안 무너졌어요."

"정말요?"

"그럼요. 세상에 앞 못 보는 아이들도 있는데, 그래도 우리 아이는 앞을 볼 수 있잖아요." 


그 말은 진심이었다. 

희운이 안과에 처음 다녀온 날, 그날 나는 속상한 마음을 달래며 이렇게 일기를 썼다. 



11.17 일기 (희운 안과 다녀온 날)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태어나면서부터 각종 희귀병을 달고 나오는 애들도 있고, 미숙아로 태어나서 고생하는 애들도 많은데... 

그래도 우리 희운이는 아예 안 보이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 희운이가 어른이 될 때쯤이면 눈을 고칠 수 있는 기술이 나올 거야. 

나도 어렸을 때, 좌우 시력 차이가 많이 나서 오른쪽 눈은 늘 두꺼운 렌즈 안경을 꼈었는데... 

희운이도 그렇게 되겠지. 

희운이가 안경 쓰기 전에  희운이의 눈웃음과 해맑은 얼굴을 많이 많이 봐 둬야겠다. 

희운이는 잘 이겨낼 거야. 이까짓 것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희망은 가장 절망적일 때 피어나고, 

감사는 가장 불행할 때 깃드는 것 같다. 

우리 아이의 눈이 이렇게 나쁘기 때문에 앞을 잘 볼 수 있는 건강한 눈을 가졌다는 사실에 새삼 감사하게 되고

더불어 여러 가지 이유로 앞을 볼 수 없는 아이들을 한번 더 떠올리게 됐으니...

무엇이든 생각하기 나름인 것 같다. 

두어 달 전만 해도 무거운 마음으로 병원을 걸어나왔는데, 이젠 깃털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나온다. 

집에 오는 길에 아이가 차창밖을 가리키며 소리친다. 

"엄마~ 크리스마스~!"

아이가 가리킨 곳을 보니, 구석진 골목 사이로 아직 크리스마스 트리가 빛나고 있다. 

내 마음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동 버스에 탄 날, 아이에게 배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