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나
아침 댓바람부터 신작로가 떠나가라 우는 소리에 옆집 아저씨가 멀거니 나와 보고 서 계신다.
"에그, 얼른 학교 가라. 그러다가 엄마한테 더 혼난다."
안타까운 듯 내뱉는 아저씨 말씀은 귓등으로도 안 들린다.
그저 무섭다는 생각뿐.
'무서워. 못 가. 안 갈 거야.'
하지만 생각은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하고 그저 서러운 울음만 꺼이꺼이 쏟아낸다.
'말해도 소용없을 거야. 나는 못 가.'
그런 내 앞에, 울어서 온통 새빨개진 내 얼굴만큼 벌게진 엄마가 서 있다.
'참을 인'을 하나하나 쌓아 올리는 표정으로 서 있던 엄마가 폭발했다.
"그럼 네 마음대로 해. 학교를 가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그 말과 함께 엄마는 돌아서 집으로 가버렸다.
'엄마, 엄마, 엄마! 무서워. 가지 마. 나는 무섭단 말이야.'
더 크게 울리는 내 울음소리는 아무것도 전하지 못했다. 속마음을 말로 꺼내는 것에 서툴던 어린 나는 그저 울고 또 울 뿐.
아침에 눈을 떴을 때만 해도 여느 때와 같은 아침이었다.
그러던게 학교 갈 준비를 하고 문 밖을 나선 순간부터 내 세상은 얼어붙었다.
눈 돌리는 곳곳마다 까만 털이 숭숭 난 애벌레들이 붙어 있었다.
나무 위에, 도롯가 풀 위에, 신작로 위에.
하룻밤새 세상의 주인이 바뀌기라도 할 걸까? 학교까지 걸어가야 하는 신작로 길은 꿈틀거리는 애벌레와 누군가에게 밟혀 이미 죽어버린 사체들로 가득했다. 그렇게 촘촘하게 깔려있는 벌레들을 보는 순간 나는 걸음을 멈춰버렸다.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하고 그저 얼음.
평소 방충망에 벌레 한 마리만 붙어도 질색팔색했던 내게 '벌레의 강'은 넘기 힘든 산이었다.
커지는 내 울음소리에 밖으로 나온 엄마는 그저 학교 늦으니 빨리 가라고 채근하실 뿐 '왜 그러냐'라고 묻지 않으셨다.
왜 너만 못 가냐는 눈빛. 답답함이 담긴 한숨.
백만 가지 생각들로 가득 찼을 엄마 마음에서 어린 내가 읽어낸 건 고작 이 정도뿐이라 더 서러웠다.
'엄마, 너무 무서워. 움직이면 벌레를 밟는데 어떻게 걸어가.'
내 말은 그저 내 안에서만 울려 퍼졌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을까.
눈에 익은 흰 장화가 나타났다. 일하다가 온 듯 작업복 차림의 아빠는 말없이 나를 보시더니 내 앞에 등을 돌리고 앉으셨다.
"업혀. 학교 가자."
그저 넓은 등을 보았을 뿐인데, 내 울음은 '엉엉'에서 '어흐흐흑'으로 바뀌었다.
고래고래 고집스러운 울음을 떠나보내고 마음을 알아준 아빠에게 전하는 투정과 반가움이 담긴 울음으로.
아빠 등에 업혀 학교 가는 길.
길가에 꿈틀거리는 애벌레도, 신작로에 속이 터진 채 누워있는 사체들도. 먼 세상마냥 멀어졌다.
그저 넓고 단단한 등에 기대어 아빠 심장소리에 맞추어 덜렁거리는 내 다리와 함께 학교에 간다.
신작로를 지나, 키 큰 풀들이 흔들리는 둑방길을 따라 걸으니 하나 둘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있다.
'애벌레가 완전 빽빽하게 길을 덮은 건 아니구나.'
'아빠는 요리조리 잘 피해서 걷네.'
공포에 질려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길'들이 빼꼼히 보인다.
20여 분간, 아까는 보이지 않던 '길'들을 눈으로 밟으며 마음으로 걸어본다. 타박타박.
내 숨소리가 완전히 평온해졌을 즈음, 학교 정문 앞에 도착했다.
나를 내려준 아빠는 그저 내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는, "들어가라." 하셨다.
그러고는 왔던 길을 돌아서 걸어가셨다.
왜 그러냐고 묻지 않으셨지만 진중하게 물어봐 주신 느낌.
왜인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랬구나' 알아채 주신 느낌.
아빠 등이 전해준, "괜찮아. 괜찮아."
아빠 손이 전해준, "할 수 있어."
그날 집에 가는 길. 아빠의 등과 손이 전해준 마음에 힘입어 나는 길을 찾아냈다.
길바닥에 벌레가 없는 빈 공간을 찾으며 겅주 겅중 건너뛰다시피 하며 갔지만 혼자서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그 해가 비래충 피해가 컸던 해였던 것 같다. 요즘도 종종 비래충 피해 얘기가 나오면 절로 그날이 생각이 난다. 그리고 마음의 결이 예민한 아이를 키우며 더 자주 그날을 떠올린다.
아이에게 그날의 아빠처럼 등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길. 머리를 쓰다듬어 줄 수 있는 사람이길.
오늘도 학교 가지 못하고 가정학습하며 마주 앉아 있는 아이를 본다.
눈이 마주치면 마주 웃으며, 웃음에 마음을 실어본다.
'괜찮아.'
오늘은 아빠의 등이 더욱 생각나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