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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혜은 Nov 01. 2023

첫 번째보다 좋은 두 번째

"엄마가 두 번째로 좋아요!"

밤 9시쯤 되면 노곤함이 밀려온다. 아침부터 동동거리며 보낸 하루의 피곤으로 신경이 좀 날카로워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아이들과 종일 함께하는 건 즐거운 고행이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집에 갇혀 지내는 요즘은 가끔 ‘즐거운’을 뗀 그냥 고행이기도 하다. 오늘은 기꺼이 감내해야 하는 그 고행의 날 중 하루였다.


“양치하고 엄마랑 책 읽자”라고 말해놓고 먼저 방으로 가서 눕는다. 몸이 가라앉는다. 온몸이 침대에 스며드는 것 같다. 절로 감기는 눈꺼풀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잠시 쉴 틈이 없었던 오늘의 내게 ‘오늘도 고생했다’ 칭찬을 건네 본다.

 

‘스스슥...’

‘부스럭..’

‘키득키득..’


열려 있는 내 귓가로 소리들이 전진해 온다.

거실에서 문간으로.  문간에서 침대 아래로.

전진해 오다 자기들끼리 부딪혀 오만소리가 섞여 깔깔댄다. 웃음에 섞인 밝은 기운이 먼저 도착해 눈꺼풀을 살며시 밀어 올린다. 실눈을 뜨고 바라보는 침대 아래가 고요하다. 오르락내리락 검은빛이 어른거리다가 동그마니 까만 해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슬금슬금. 멈칫멈칫.


눈치 보며 야금야금 올라오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커다랗고 동그란 눈이 더 커지더니 까르르르 웃으며 폭풍처럼 덮쳐온다. 순식간에 침대를 기어오르더니 어느새 내 배 위에 납작 엎드려 킁킁거린다. 강아지처럼 꼬무락거리더니 해실해실 웃으며 내 귀에 대고 속삭인다.


“엄마가 두 번째로 좋아요.”


아, 요 예쁜 녀석!

 




우리 둘째는 궁금한 것이 정말 많은 아이이다. 하루종일 ‘대화’하는 걸 좋아한다. 얘기 나누다 보면 저 머릿속엔 무슨 주머니가 저렇게 많을까, 이번엔 또 어떤 주머니를 꺼낼까 궁금해진다.

종알종알 얘기 끝에,


“엄마 사랑해요. 엄마가 제일 좋아요.” 하며 양팔 벌려 폭 안아주길래,

“엄마도 우리 별이가 너무 좋아. 사랑해.” 하며 마주 안아 주었다.


그 품에서 아이가 묻는다.


“그런데 '나'는 얼마만큼 사랑해야 돼요? 엄마도, 아빠도, 형아도 사랑하는데 '나'는 얼마만큼 사랑해야 하지?”


제법 진지하고 기특한 그 물음이 예뻐서 웃음이 난다.


“우리 별이를 가장 사랑해야지. 스스로를 가장 사랑해야 해.”


“왜요? 나는 엄마가 제일 좋은데...”


요렇게 예쁜 말을 입에 물고 나를 빤히 쳐다본다.


“자기를 사랑할 줄 알아야 자기 주위 사람들도 사랑할 수 있거든. 내가 가장 튼튼한 집을 지어야 그 힘으로 주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고, 사랑을 나눠줄 수도 있는 거야.”


가만히 듣고 있더니,

“아, 나한테 초코가 많을수록 사람들한테 더 많이 나눠줄 수 있잖아. 그치 엄마?”

하고 묻는다.


그래. 그래. 너한테 넘쳐나야 흐를 수 있는 거란다. 너의 초코를 많이 쌓아 올리렴.


그렇게 마무리된 대화가 오늘 낮의 일이다. 그걸 기억했다가 요렇게 예쁘게 표현하는 아이가 눈부셔서 내 마음이 넘쳐흐른다.

 



"엄마가 두 번째로 좋아요."



첫 번째보다 기쁜 두 번째다.

나의 말대로 자기를 가장 앞에 놓고, 기꺼이 나를 두 번째 자리에 앉혀 주는 녀석이 고마워서 무거워지던 눈꺼풀이 번쩍 뜨인다. 오늘은 기꺼이 감내해야 하는 고행의 날 중 하루가 아니고 역시 ‘즐거운’ 고행의 날이다.


물도. 양분도. 햇빛도. 관심도.

주면 주는 대로 받아먹고 자라는 이 예쁜 싹을 기르는 일이 힘들기만 할 리가 없다.

오늘 나는 마음의 밭에 거름을 뿌리는 엄마 농부다. 단단히 뿌리내릴 거목을 키워내는.


그래서 오늘도, 내일도, 즐거운 고행에 온몸으로 뛰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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