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갑니다!
콜록콜록.
기온이 바짝 떨어져 며칠 내내 동동거리며 돌아다녔더니 감기가 찾아왔습니다.
으슬으슬한 몸에 이것저것 여러 겹 껴입고 거실로 나갔더니 아이들이 쳐다보며 깔깔거립니다.
"엄마, 펭귄이에요? 펭귄 같아요."
"아냐 아냐, 헐크다. 헐크."
엄청 재미있는 얘기라도 하는 듯 깔깔거리며 웃어대는 아이들에게,
"그래, 엄마 헐크 됐다." 콜록콜록.
기침을 달고 대답해 줬더니 눈이 동그래진 둘째가 쪼르르 쫓아옵니다.
"엄마, 감기 걸렸어요?"
"응, 감긴가 봐. 목이 아프네."
내 말에 나를 폭 안고 올려다보던 아이가 말합니다.
"그럼, 보리차 끓여 드릴게요."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정답을 찾은 듯 외친 아이는 뒤돌아 주방으로 갑니다.
어느새 움직였는지, 큰 아이는 우리 집에서 가장 큰 물 끓이는 주전자를 찾아 물을 올리고 있고 둘째는 보리차 티백을 찾아 주전자 옆에 잘 놓아둡니다.
"엄마는 여기 앉아 있어요. 끓으면 갖다 드릴게요. 물 많이 마셔야 해요. 알죠? 찔끔찔끔 말고 꿀꺽꿀꺽 마셔요. 물만 많이 마셔도 초기 감기는 뚝! 알죠?"
헐크에서 감기환자로 바뀌니 대접이 융숭해집니다. 아이들 감기 때마다 내가 했던 말들을 고스란히 내게 돌려주며 환자 간호 모드에 들어간 아이들.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예쁘기도 해서 가만히 보고 있으니 어느새 물 끓는 소리가 납니다.
부르르 부르르 부글부글.
뒤이어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안 봐도 알 것 같습니다.
'다 끓었으니 불 끄세요!' 하는 주전자 휘슬이 울릴 거고, 보리차 티백에 구수한 내음이 퍼져가면 김이 오르지만 적당히 식은 보리차 한잔을 내게 가져다줄 겁니다.
그리고 본인들도 한잔씩 따라서 내 옆에, 내 앞에 앉아 얘기를 시작할 겁니다.
아이들은 처음으로 주전자 뚜껑에 수증기 빠지는 구멍을 내어 특허는 냈다는 책에서 읽은 어느 일본인 이야기를 꺼낼 거고, 나는 화목난로 피우던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겨울 화목난로 위에 올려 뒀던 커다란 양은 주전자 얘기를 할 겁니다.
그 주전자의 물 끓는 소리, 김이 폴폴 오르는 주전자가 주었던 안온했던 교실 풍경.
아이들 감기 때마다 내가 늘 해주었던 일들을 반대로 받아보니, 아이들이 감기 걸렸을 때마다 "엄마, 보리차!"를 외치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보리차는 간질거리고 따끔거리는 목을 가라앉게 해주는 약차.
가족들의 사랑을 보여주는 '관심'의 바로미터.
어설픈 초기 감기쯤이야 한방에 날려버리는 따뜻함의 집약체입니다.
우리 집에 보리차 끓는 소리가 나면, 오던 감기가 현관 밖으로 슬그머니 도망갑니다.
감기와 보리차와 애정 어린 관심이 넘쳐나는 어느 흔한 겨울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