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경주.
전설은 환상과 현실의 경계 어디쯤에서 역사적 유물에 특별한 후광을 드리운다.
아련하거나 감동적이거나 무섭거나 슬픈.
지금 그 전설 중 하나를 만나러 불국사로 향한다. 많은 유물들 중에서도 전설이 따라붙는 유물들이 유독 사랑받는 이유는 그 전설의 특별한 후광 때문 아닐까. 그래서인지 마음이 유독 설레발친다.
오늘의 주인공 앞에 섰다. 바로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무영탑)'이라 불리는 석가탑이다.
석가탑을 만든 백제의 석공 아사달과 그의 부인인 아사녀의 슬픈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그 탑이다.
탑을 마주한 첫 느낌은 그런 슬픈 전설 따윈 생각지도 못할 만큼, 단순하지만 미려하고 고고하다. 정갈한 균형미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리보고 저리보고, 홀린 듯 보다가 미인의 애교점처럼 매력적인 석가탑의 매력점을 찾았다.
바로 탑의 각 층 모서리다. 모서리가 하늘을 향해 살포시 들려있다. 한옥의 처마 끝이나 살짝 휜 버선코처럼 말이다. 그 우아한 곡선 때문일까. 석가탑은 고아한 선비처럼도 보이고 새침한 아가씨 같아 보이기도 한다.
이런 여러 얼굴을 가진 석가탑을 만들면서 아사달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백제에서 남편을 찾아온 아사녀는 남편은 보지도 못하고 영지 연못가에서 탑이 비치기만을 기다리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결국 닿지 못한 간절함은 아사달이 생각한 현생 부처의 모습으로 석가탑에 남아 있는 건 아닐까?
혼자만의 질문과 상상이 꼬리를 문다. 유물을 두고 상상하게 하는 힘! 이게 전설이 가진 힘 아닐까.
온갖 질문을 던져 대다가 석가탑이 토해낸 또 다른 유물에 생각이 미친다.
바로 현존하는 목판인쇄물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다.
도굴꾼에 의해 손상된 탑을 수리하기 위해 해체하면서 발견된 보물이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처음 발견한 사람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나라면 손이 떨려 먼저 꺼내는 걸 사양했을 것 같다. 세상에 첫 얼굴을 내미는 보물을 냉정하고 안전하게 옮기기엔 내 가슴이 너무 방정맞게 뛸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훼손된 유물을 수리하고 유지하고 보수하고. 그 과정에서 세상에 드러나는 보물들은 우리 역사에 근사한 무게감과 반짝이는 자긍심을 더해준다.
경주가 매력적인 이유.
아직 발견되지 못한, 알아주길 기다리며 잠들어 있는 보물들이 도처에 숨어있기 때문 아닐까?
말 그대로 어디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보물밭.
경주라는 이상한 나라의 여섯 번째 걸음에서, 전설의 후광을 온몸으로 느끼며 고이 잠들어 있는 보물들이 여기저기서 기지개를 켜는 상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