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경주.
경주에서의 마지막 일정이다. 또 다른 전설들을 만나고 짧은 일정을 차분하게 정리하기 위한 곳. 국립경주박물관이다.
박물관 부지에 들어서자마자 자연스레 눈이 가는 곳이 있다.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성덕대왕신종이다. 우리가 흔히 '에밀레종'이라고 알고 있는 바로 그 종이다.
시선을 고정한 채 후다닥 뛰듯이 걸어 종 앞에 도착했다. 종이 어디 가는 것도 아닌데 마음이 어찌나 급한지 걸음이 따라가기 바쁘다.
숨 가쁘게 도착해선 종을 뚫어져라 관찰한다. 아니 거의 노려본다. 종안에 아기가 들어간 흔적이라도 찾듯이.
인신공양설화가 거짓인걸 알지만 종 앞에 서니 자연스럽게 눈매가 새초롬하게 가늘어지며 종을 까칠하게 쳐다보게 된다. '너는 왜 그런 전설을 갖게 됐니?' 물음이 절로 나온다.
성덕왕의 공을 기리고자 아들인 경덕왕 때 시작해서 손자인 혜공왕 때 완성되었다는 종.
기나긴 시간과 엄청난 물적자원이 동원되었음은 거대한 범종의 몸체만 봐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종을 만드는 이들은 무언가 2% 부족하다고 느낀 건 아닐까?
요즘 식으로 치면 성덕대왕을 후세까지 기리기 위한 MSG가 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성덕대왕을 칭송하는 백성들의 마음이 자극적인 이야기로 표현된 걸까?
왜 이런 잔인한 인신공양 설화가 따라붙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성덕대왕의 이름이 후세까지 길이길이 전해지고 있으니 이 MSG는 성공인 셈이다.
지금 이곳에 와 있는 나와 주위에 바글바글한 아이들만 봐도 대성공이 분명하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가득 담아 종을 노려보고 있으니 마침 종이 울린다. 비록 녹음된 종소리지만 울림이 깊고 소리가 오래도록 멀리 퍼진다. 온갖 마음들이 담겨있을 종소리를 눈을 감고 들어본다.
종소리 사이에 "에밀레~ 에밀레~" 재잘대는 아이들 소리가 섞여 들어온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그래, 이 MSG는 대성공이야!'
전설이 어떤 식으로 유물에 생명력을 부여하는지 또 한 번 느끼는 순간이다.
성덕대왕과, 종을 통해 왕권강화를 이루고 싶었을 경덕왕을.
종을 만드는데 참여했을 기술자들을.
시주를 통해 마음을 보탰을 그 당시 신라 사람들을.
종을 통해 떠올려본다.
'에밀레종'이라는 잔인하지만 기가 막힌 옷을 덧입은 성덕대왕신종은 오늘도 건재하고 내일도 그러할 것이다.
유물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힘! 전설의 힘을 또 한 번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