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잔에 물이 찰랑거리면

표면장력

by 은혜은

가끔 잔에 물을 따르다 보면 아슬아슬하게 멈춰 설 때가 있다. 잔이 넘칠세라 화들짝 놀라 멈췄는데 물이 잔을 채우다 못해 볼록 솟아올라 서로 움켜잡고 있는 순간을 마주하면 그 절묘함에 감탄이 새어 나온다.

물이 한 방울이라도 더 떨어지면 왈칵 쏟아져 내릴 것 같은 그 아슬아슬함이 가끔 충동질하기도 한다.

'한 방울만 더 떨어뜨려볼까?'

뒷수습할 것을 생각하면 그저 생각에 그치고 말지만 그 한 방울이 꼭 필요한 순간이 있다.

표면장력을 깨뜨리고 왈칵 쏟아져 내려야 할 순간. 바로 아이의 그릇이 커지는 순간이다.


낯가림이 좀 있고 새로운 것을 대할 때면 찬찬히 관찰하고 적응하는 나름의 시간이 꼭 필요한 우리 아이는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걸 싫어한다. 아니, 싫어한다기보다 그 과정이 불편해서 웬만한 건 시도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불편해도 꼭 해야 할 일은 있는 법이다.


예를 들어 새로운 학원을 가야 할 때.

내켜하지 않는 아이에게 먼저 슬쩍 운을 떼고 몇 번 더 말하며 학원에 가긴 해야 한다는 걸 인지시킨다. 한 번, 두 번, 세 번.

'음, 이거 언젠가 해야 하는 건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도록.

그다음엔, 슬쩍 학원 앞을 지나가며 툭 말을 던진다.

"누구도 다니고, 집에서도 가깝고. 처음 시작하기엔 괜찮은 것 같아." 말을 던져놓으면 아이는 그저 "그래요?" 하고 지나간다.

하지만 그 "그래요?" 하는 사이에 아이는 간판과 학원 위치와 건물 분위기를 순식간에 살핀다.

되도록 자주 지나가며 "언제 한번 가보자." 슬쩍 말을 얹어본다. 그러면 아이는 "음, 그래요." 대답한다.

그 "그래요." 안에 '한번 가긴 해야 하는구나.'가 아이 마음속에 동그마니 자리 잡는다.

그렇게 노출하고 준비시킨 뒤에 슬며시 날짜를 제시해 본다.

"우리 이번 금요일에 한번 학원 구경 가볼까? 구경하고 나와서 도넛도 먹자."

내 말에 아이는 보통은 별로 안 내킨다는 얼굴로 쳐다본다. 그러면 얼른 덧붙인다.

"그냥, 구경만. 싫으면 좀 더 있다가 가도 되고 다른 학원에 가도 돼. 그냥 구경만 하고 오자."

엉덩이를 가볍게 만들어 주는 말을 던지면 그제야 허락이 떨어진다.

가볍게, 심심풀이 삼아, 정말로 구경만 간다는 마음으로 아이와 함께 학원을 '구경'가본다.

시작이 어렵지 꾹꾹 눌러놓은 호기심도 많고 배우고 싶은 욕심도 많은 아이는 한 번 구경 가보면 반쯤 넘어간다. 반쯤 넘어간 아이를 데리고 달콤한 당을 채워 넣으며 물어본다.

"어땠어?"

정말 혹할 만큼 좋았을 땐 한번 다녀보겠단 말이 나오지만 미적지근한 반응이 나오면 슬쩍 물러선다.

"그럼, 다음에 다른데도 한번 가보자. 엄마는 어디든 괜찮아. 근데 다니긴 해야 해."

여기까지 해놓으면 아이 나름대로 머릿속이 바빠지는 게 보인다. 그리고 나는 기다린다. 이번이 되면 좋겠지만 안된다면 다음번을 기약하며 넉넉한 마음이 되려고 노력하면서.


이 과정은 짧으면 몇 주에서 길면 몇 달씩 걸린다.

뭐든 배우고 싶다고 나서는 옆집 아이 얘기를 들으면 신기하고(우리 아이와는 '종'이 다른 느낌이다.) 내 아이가 답답하기도 하지만 기다린다. 제시하고 기다려주는 과정 중간중간 불뚝한 마음이 올라오기도 하지만 결국 배우는 주체는 아이이기에 기다린다. 단, 언젠가 하긴 해야 할 일이라는 메시지만 일관되면 결국 길을 찾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아, 쓰다 보니 살짝 숨 막힌다.

나는 이렇게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 아닌데 아이를 키우며 내 인내심의 그릇도 나도 모르는 새 점점 커졌나 보다. 하지만 다행인 건 처음은 정말 긴 호흡으로 가슴 답답함을 이겨내며 기다려야 한다면 두 번째, 세 번째에는 그 시간이 조금씩 짧아진다는 사실이다. 처음 가는 길과 한 번 가본 길의 차이가 아이 걸음에서 느껴진다.

그렇게 기다림의 시간이 점점 짧아지다가 어느 순간, 힘들어하던 일을 무난하게 해내는 아이를 발견하게 된다. 기다리던 "심봤다!"를 외치고 싶은 순간이다.


조금씩 물을 흘려가며 자신의 잔을 채워가던 아이는 그 잔이 가득 채워졌을 때 기쁨보다는 불안과 불편함을 먼저 느낀다. 이 잔 너머엔 뭐가 있을까? 잔 밖의 세상은 안전할까? 선뜻 발이 디뎌지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아는 만큼만 붙들고 있으면 아이는 성장할 수 없다.

흘러내리지 않으려 깍지 낀 아이의 손을 살살 간지럽혀 펴게 하는 힘. 그래서 한번 뛰어내려볼까 용기 내게 하는 힘.

나는 기다림과 방향을 제시하는 메시지를 한 방울, 두 방울 아이의 손에 똑똑 떨어뜨린다. 그리고 표면장력이 깨지길, 깍지 낀 손을 놓고 아이가 뛰어내리길 기다린다.

물 잔이 대접으로, 대접이 양푼으로, 양푼이 양동이로, 양동이가 욕조로, 욕조가 수영장으로.

커가는 아이의 그릇을 기쁜 마음으로 응원하며 내 인내심의 그릇을 같이 키워가며 기다린다.


표면장력을 깨뜨리고 왈칵 쏟아져 내리는 순간, 그 순간이 아이의 그릇이 커지는 순간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찰랑거리는 아이의 그릇을 흘러 넘치게 할 한방울을 똑 떨어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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