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로이탈도 괜찮아요!

으스스한 놀이터

by 은혜은

집에 오자마자 가방은 던져놓고 뒷마당에 있는 창고로 달려간다. 호미, 낫, 갈퀴, 키(곡식의 쭉정이나 티끌을 골라내는 도구), 도리깨, 삽, 그물, 큰 대야, 작은 대야 등등. 온갖 물건 섞여있는 곳을 두리번거리다가 찾았다.

"여기 있어."

내 목소리에 언니 2호가 달려온다.

"몇 개 있는데?"

"두 개."

모자란 개수에 잠시 고민했지만 번갈아 쓰면 되니까 괜찮다. 찾아낸 물건 두 개를 야무지게 챙겨 2호 언니와 함께 달려간다. 1호 언니와 3호 언니가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공동묘지로.


우리 동네엔 공동묘지가 있다. 차가 다니는 큰길을 사이에 두고 바닷가 쪽은 마을이고 길 건너 숲은 공동묘지다. 숲의 나무 사이사이 공터마다 무질서하게 묘가 자리 잡고 있다. 찻길이래 봐야 내 걸음으로 열 걸음이면 건널 수 있으니 바로 엎어지면 코 닿을 데 묘지가 있는 셈이다. 낯선 동네에 가서 이런 모습을 봤으면 '우와, 무섭지도 않나?' 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무 느낌이 없다.(전설의 고향 볼 때나 밤에 화장실 갈 때만 빼고.) 태어나보니 마을이 공동묘지와 마주 보고 있었고 그 묘지들을 뛰어다니며 산딸기 따고, 칼싸움하고, 숨바꼭질하고, 방학 숙제로 제출할 곤충과 풀도 채집하는, 내겐 그저 '공동묘지'라고 이름 붙은 놀이터다. 뛰어놀다 가끔 증조할아버지 묘 앞을 지나갈 때면 아는 사람(?) 있어 든든한 그런 놀이터.


그 놀이터가 오늘은 더 북적거릴 예정이다. 며칠 전 내린 큰 눈이 살짝 녹았을 뿐 아직도 어마어마하게 남아있으니 썰매장 개장하기에 딱 좋은 날이다.

도착하니 이미 아이들로 가득하다. 제각각 장만한 썰매를 손에 들고 자신이 알고 있는 썰매 명당에 자리 잡는다. 가장 많이 들고 온 썰매는 비료포대와 쌀 포대다. 튼튼하고 젖어도 찢어지지 않아 눈썰매로 그만이다. 그래도 최고는 비료포대다. 매끈한 표면 덕분에 마찰력을 줄이며 정말 빠르게 내려간다. 2호 언니와 내 손에 들려있는 것도 그 비료포대다.


두 장의 비료포대를 들고 묘지에서도 소문난 명당 앞에 선다. 가파른 경사면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의 평지, 그 위에 자리 잡은 묘가 있는데 이 묘 위에서 썰매를 타면 경사면 아래까지 길게 타고 내려갈 수 있다. 우리 동네 철수와 영희라면 누구나 아는 썰매 맛집이다. 역시나 먼저 온 철수들이 신나게 썰매를 타고 있다. 철수들이 썰매길을 내어놓은 덕분에 우리는 그저 타기만 하면 되니 나쁠 건 없다.

철수들 뒤에 얼른 줄을 선다. 1호, 2호, 3호 언니, 나, 막둥이 남동생. 순서대로 서서 철수들 썰매가 바람처럼 미끄러지는 걸 지켜본다. 한데 가만히 보고 있으니 새삼스레 높아 보인다.

"하나도 안 무서워. 진짜 재밌어. 한 번 타보고 무서우면 저기 옆에 낮은 데 가서 타도 돼."

말은 남동생에게 건네지만 혹시나 비료포대와 분리되어 따로따로 굴러 내려갈까 봐 살짝 무서운 마음에 가슴이 콩닥거린다. 두근. 두근.


드디어 내 차례다. 꼭대기에 앉아보니 옆에서 보는 것보다 더 높다. 다리가 조금 후들거리지만 여러 갈래로 난 썰매길 중에서 어느 길을 타고 갈지 신중하게 골라본다. 가장 멀리까지 길게 이어진 길을 목표로 엉덩이를 살짝씩 움직여 깔고 앉은 포대의 위치를 조정한다. 준비됐다. 심호흡 한번 하고 양손으로 포대 귀퉁이를 꽉 움켜잡는다.

삼. 이. 일. 출발!

몸을 한껏 뒤로 젖히고 아래까지 곧장 내려가 우아하게 착지하고 싶었건만 내 마음과 다르게 높게 들어 올리지 못한 한쪽 발에 걸려 나는 경로를 이탈하고 있다. 경로이탈. 경로이탈. 경로이탈. 머릿속에 알림음이 메아리치지만 뭐 어때. 괜찮다. 이쪽 길도 재밌다. 아주 많이.


선수처럼 매끄럽게 내려간 아이도, 옆길로 빠져 굴러간 아이도, 지켜보며 서 있는 아이도 모두 깔깔거리느라 정신없는 이곳.

으스스한(?) 놀이터에 이번 겨울 첫 비료포대썰매장이 개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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