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눈 내린 날
온 동네 개들이 짖는 소리에 눈이 번쩍 떠진다. 양 옆에 언니들이 아직 자고 있는 걸 보면 이른 아침이 분명한데 동네 개들이 수상하다. '무슨 일이지?' 아침 찬바람이 싫어 창호지에 손가락 구멍을 뚫어 살짝만 볼까 하다가 그냥 방문을 빼꼼 연다. 아침 댓바람부터 혼나는 건 사양이다.
그리고 빼꼼한 문 사이로 보이는 예상치 못한 풍경에 입이 벌어진다. "어, 어, 어!!!" 이럴 수가.
'자고 일어나니 딴 세상이 됐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 분명하다. 어젯밤 잠들기 전까지 휑하기만 하던 마당에 솜사탕처럼 포슬하게 겹겹이 쌓인 눈이 가득 찼다. 그냥 눈이 온 게 아니고 내 허벅지까지 닿을 만큼 깊은 눈이 내렸다. 장독대와 수돗가와 마당의 경계가 사라졌다. 여기도 수북. 저기도 수북. 온 세상이 새하얗다. 동네 개들이 아침부터 소란스러운 게 이 눈 때문이라면 그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일종의 조건반사 같은 거니까. 내린 눈에 흥분해서 목청이 커지는 나처럼 말이다.
"언니, 언니, 일어나. 눈 대따(엄청) 많이 왔어!!"
방방 뛰는 내 목소리에 깨어난 언니 1호, 2호, 3호가 열린 문 밖을 보더니 눈이 동그래진다.
그래, 오늘은 바로 그날이다. 일 년에 몇 번 없는 큰 눈 내린 날. 이런 날 이불속에서 뒹구는 건 말도 안 된다.
모두 같은 생각을 했는지 언니들 동작이 날쌔진다. 마침 일요일이니 아침 먹고 나면 온 동네 아이들이 골목으로 쏟아져 나올 거다. 우리도 서둘러야 한다. 마음이 바쁘다.
구불구불한 골목마다 사람 한 명 지나갈 만큼 좁은 길이 생겼다. 길을 만드느라 양 옆으로 쌓아 올린 눈은 내린 눈 위에 더해져 우리 허리 높이까지 쌓였다. 눈높이가 달라진 동네가 신기해 두리번거리면서도 언니들과 함께 공터로 가는 걸음은 자꾸 빨라진다.
이런 부지런한 새나라의 어린이들을 봤나. 서두른다고 했는데 우리 집 뒤쪽 넓은 공터엔 벌써 아이들로 가득하다. 동네 철수, 영희들 다 모였다. 사방에 눈 뿌리는 철수 1호. 눈으로 벽을 쌓고 진지를 구축하는 철수 2호와 3호. 눈을 크게 뭉쳐 던지는 철수 4호. 눈 위에 대자로 드러누운 철수 5호. 벌써 완성한 눈사람을 다듬고 있는 영희 1호. 그저 뽀득거리며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밟고 다니는 영희 2호. 눈 속에 파묻혀 허우적거리는 동네 동생 1호, 2호, 3호... 다들 각자의 방법으로 즐기느라 바쁘다.
우리도 아직 아이들 손길이 닿지 않은 한쪽에 자리 잡는다. 1호, 2호, 3호 언니와 나, 남동생까지. 털모자에 목도리, 장갑으로 무장하고 손엔 챙겨 온 도구 하나씩 들고 눈을 헤집는다. 그러다 1호 언니가 눈을 작게 뭉치더니 눈밭에 올려놓고 데굴데굴 굴리며 부피를 키운다. 2호 언니도 눈뭉치를 굴리기 시작한다. 눈사람을 만드려나보다. 나와 3호 언니는 가만히 뒤를 따라간다. 이렇게 눈이 많으면 눈덩이는 금세 몸집을 키운다. 혼자 굴리기 힘들 만큼 커지면 함께 밀어야 한다. 그렇게 계속 굴리면 쇠똥구리가 굴리는 쇠똥처럼 우리 몸보다 더 크게 만들 수도 있다. 힘만 세다면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눈사람을 만들 거니까 적당한 크기로 몸집이 불어나면 멈출 거다. 머리를 들어 올릴 수 있을 정도의 크기만 되면 딱 멈추면 된다.
그런데 이상하다. 눈덩이가 자꾸 커진다. 굴릴 때마다 눈덩이 밑에서 뽀득거리는 소리가 재미나서, 순식간에 커지는 덩치가 신기해서 자꾸만 굴리고 있다. 둘이서 더는 밀지 못할 만큼 무거워진 눈덩이가 공터에 멈췄을 땐 눈사람이 아니라 눈 거인을 만들어야 할 상황이 됐다. 2호 언니가 굴리던 눈덩이도 마찬가지다. 너무 커져서 도저히 들어 올릴 수가 없다. 거대해진 눈덩이 두 개를 놓고 난감한 물음표들이 동동 떠다닌다.
'어떻게 하지?'
답은 갑자기 뚝 떨어졌다.
"이 눈사람은 누워있네. 힘들어서 누운 거로 하면 되지."
막둥이 남동생이 툭 던진 말에 머릿속이 환해지는 기분이다.
"아, 그럼 되겠다. 이 눈사람은 힘들어서 누워 자고 있는 거야."
남동생이 던져준 답대로 우리는 눈사람을 꾸민다. 거대한 눈덩이 두 개를 밀어서 바짝 붙이고 울퉁불퉁한 면을 모종삽으로 둥글게 다듬는다. 좀 더 작은 눈덩이 위에 눈, 코, 입 자리를 표시해 놓고 소복하게 눈을 이고 있던 소나무의 솔잎을 한 움큼 뜯는다. 그 솔잎들로 비어 있던 눈, 코, 입을 채워주고 솔잎이 하늘거리는 조금 긴 가지를 꺾어 양쪽 허리에 꽂아주니 '누워 자는 눈사람' 완성이다.
왜 눈사람을 항상 세워놓았을까! 피곤한 눈사람도, 졸린 눈사람도 있을 텐데 왜 눕힐 생각은 못했을까! 똘똘한 막둥이 덕분에 넓은 공터에 누운 거대한 눈사람은 무척 편안해 보인다. 앞으로는 종종 눈사람을 재워줘야겠다.
큰 눈 내린 날.
해가 넘어가는 넓은 마을 공터에는 영희 1호가 만든 서있는 눈사람 하나, 철수 2호와 3호가 만든 튼튼한 진지 하나, 오늘의 소란을 보여주는 정신없이 찍혀있는 무수한 발자국들과 우리가 만든 '누워 자는 눈사람' 하나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