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아침은 눈 뜨기가 힘들다. 문에 바른 얇은 창호지 사이로 바람이 드나드는 탓에 이불을 입까지 끌어다 덮고 잤지만 코끝이 시리다. 코까지 덮었어야 했는데. 아쉬워하며 시린 코를 손등으로 비비적거리다 보니 벌써 아침이다. 엄마가 깨우기 전에 추위가 먼저 깨운 탓에 오늘도 학교에 지각할 일은 없겠다.
찬바람이 방 안 모두에게 다녀갔나 보다. 언니들이 이불속에서 하나, 둘 꿈틀거린다. 잠시 꿈틀거리던 분홍 꽃무늬 내복들이 벌떡 일어나 빠르게 이불을 정리하더니 한 명씩 마당에 있는 수돗가로 나간다. 내복에 있는 꽃들이 덜덜 떨 만큼 춥지만 세수는 해야하니까!
수돗가엔 엄마가 한 들통 끓여다 놓은 뜨거운 물이 김을 내뿜으며 기다리고 있다. 한 사람에 한 바가지씩. 찬물과 섞어 미지근하게 만든 후에 눈, 코, 입, 얼굴을 문지르고 목을 살짝 건드려준다. 그리고 손을 씻으면 고양이 세수 끝. 겨울 아침엔 고양이 세수보다 더 꼼꼼한 진짜 세수는 꿈도 꿀 수 없다. 이게 다 추위 탓이다.
꽃무늬 내복 위에 바지와 티셔츠 입고 복장이 갖춰지면 밥상 앞에 앉는다. 언니 1호, 2호, 3호와 나, 그리고 남동생. 5남매 밥상 위엔 반찬이 빼곡하다. 하지만 그 밥에 그 나물. 오늘도 매일 먹던 친구들이 모여 앉아있다.
빨간 배추김치(우리가 좋아하는 줄기 부분만 많이 담긴 건 비밀), 오독이며 씹는 맛이 있는 굵은 멸치 볶음, 뒷집 아저씨가 키우는 염소가 싼 똥을 닮은 까만 콩자반(엄청 맛있다는 건 비밀), 하얗게 무쳤지만 먹으면 숨어있던 감칠맛이 폭발하는 콩나물 무침, 그리고 어제 그물에 잡힌 눈알도 투명하고 맑았던 싱싱한 명태로 끓인 생태탕. 거의 매일 먹는 것들이라 그 익숙함이 지겨워 입이 삐죽 나오지만 한 입 먹어보면 손과 입이 바빠진다. '고기 없어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려다가 쏙 들어간다.
입과 몸이 호강한 아침을 먹고 나면 등교 준비로 바빠진다. 똑 단발인 언니들과 달리 나는 머리가 길다. 긴 머리를 꼭 묶고 다니는데 뒤통수에 하나로 묶을지, 양갈래로 갈라 양쪽 옆통수에 하나씩 묶을지, 하나로 길게 땋을지, 양갈래로 땋을지가 매일 고민이다. 오늘은 양갈래로 묶기 당첨. 정확하게 반을 갈라서(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있으면 안 된다.) 양쪽 같은 높이에 묶어주고 흩날리는 잔머리는 똑딱핀으로 눌러주면 준비 끝. 어느 각도에서 봐도 좌우대칭이다. 아주 만족스럽다.
매서운 자기 검열을 통과하면 외투 입고 가방 메고 주방으로 간다. 우리 집 주방엔 방 아랫목 장판을 누렇게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하는 연탄아궁이가 있다. 그 옆으로 등교 준비를 마친 언니 1호, 2호, 3호와 나, 그리고 남동생이 모여 선다. 그저 둘러섰는데 가만 보면 늘 순서대로 줄을 서있다. 습관이 이렇게 무섭다.
주방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건 아궁이 옆에 올려놓은 보온도시락 다섯 개와 똬리를 틀고 있는 목도리 다섯 개, 그리고 엄마다.
우리의 준비상태를 한 명씩 확인한 엄마는 '등교준비합격증'인 목도리를 감아준다. 엄마가 별말없이 목도리를 감아주면 준비 잘했다는 뜻이다. 오늘 내가 받은 합격증은 다섯 개의 목도리 중에 가장 긴, 새빨간 털목도리다. 얼마나 긴지 그저 목에 툭 걸치면 목도리 양쪽 끝이 내 발등에 닿을 만큼 길다. 굵은 털실로 성기게 짠 그 목도리를 엄마는 내 목에 둘둘 감는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찬바람 들지 마라, 감기야 오지 마라, 학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따뜻해라.' 마음을 담아 둘둘둘 감는다.
어찌나 꽁꽁 감았는지 내뿜는 내 숨도 빠져나가지 못해 답답함에 도리질 치면 숨구멍만 살짝 열어준다. 그 숨구멍에 적당히 타협하고 답답해도 목도리를 풀진 않는다. 찬바람 맞으며 걸어가는 등굣길에 이 목도리가 방패막이가 되어줄 걸 알기 때문이다. 아침으로 먹은 반찬이 똑같이 들어있을 보온도시락까지 손에 들면 준비 끝.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돌림노래 인사를 뒤로하고 대문을 나선다.
집 앞 큰 도로를 따라 걷다가 마을 초입의 버스 정류장을 지나고 제방둑에 놓인 다리를 건너 찻길 따라 쭈우우우욱 옆 동네까지 걸어가서는 옆동네 마을 안쪽 길을 따라 한참 들어가면 나오는 학교를 향해 걷는 길.
매서운 바람 막아줄 건물하나 없는 허허벌판을 한참 걸어야 하는 등굣길에 의지가 되는 건 엄마가 둘둘 감아준 목도리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줄 맞추어 걸어가는 우리들이다. 1호 언니가 앞장서고 막내 남동생 가운데에 끼워 넣고 학교를 향해 걷는다. 1호, 2호, 남동생, 3호, 나. 고만고만한 걸음들 사이에서도 혹여 누구 하나 뒤처지지 않을까 발맞춰주는 마음에 힘입어 겨울 칼바람 속을 헤쳐간다.
줄줄이 사탕처럼 달랑달랑.
한 줄에 꿰인 굴비처럼 달랑달랑.
학교는 멀지만 달랑이는 마음들이 있어 걸을만한 등굣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