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짚가리'는 사랑이다
학교에서의 시간은 쏜 살 같은 날도 있고 교실 시계가 고장 났나 싶을 만큼 느리게 가는 날도 있다. 오늘은 다행히 쏜 살 같은 날이다. 쉬는 시간마다 남녀 대항 공기대전이 열려 아주 정신없이 바빴다. 공깃돌이 위로 던져 올려질 때마다 '손에 착착 붙어라!' 온 마음으로 응원한 게 통했나 보다. 여자 대표 영희의 손이 신들린 듯 움직였고 결국 이겼다. 설욕을 다짐하는 철수들과 내일 2차전을 기약하며 집에 가는 길. 한낮에도 바람이 매섭다.
아침에 등교할 땐 5남매가 함께 하지만 하교할 땐 같은 동네 친구들과 함께 간다. 근처 4개 동네 통틀어 하나밖에 없는 국민학교(초등학교)이고 인구수가 적어 한 학년에 한 반씩 밖에 없는 미니 학교다 보니 동네 친구가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쭉 함께 생활한다. 알고 싶지 않아도 옆집 숟가락 개수까지 알게 되는 그런 사이가 된다.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 학교를 빠져나오며 하굣길을 정해 본다. 집과 학교를 오가는 통학로는 3가지가 있는데 아침에 우리 5남매가 줄지어 걸었던 길은 평탄하지만 돌아가야 해서 시간이 가장 오래 걸리는 길이다. 또 다른 길은 학교에서 우리 동네까지 강을 따라 높다랗게 쌓아 올린 제방둑 위를 걸어가는 길이다. 거리도 짧고 길도 고른 편이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높은 둑방길을 따라 걷는 동안 세상 모든 바람이 내게로 몰아치는 것 같은 추위를 견뎌야 한다. 생각만 해도 고개가 저어진다. 사양하고 싶다. 그럼 남은 길은 하나, 논길이다. 멀리 돌아가는 첫 번째 길과 세상 모든 바람을 견뎌야 하는 두 번째 길 사이에 있는 논들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길이다. 가장 빠르지만 논이 쉬어가는 얼어붙은 겨울에만 쓸 수 있는 길. 오늘 하굣길은 만장일치로 이 논길이다.
방향이 정해지니 움직임에 속도가 붙는다. 이 논, 저 논 할 것 없이 모두 얼어붙어 경계 짓는 게 무의미한 논으로 성큼 들어선다. 기세 좋게 들어선 논길에도 우리 걸음을 붙드는 방해물은 있다. 가을걷이 후에 남은 벼 밑둥들이 돌처럼 딱딱해진 채 빼곡하게 포진해 있다. 벼 밑둥에 걸리지 않게 요리조리 피해 걸으면 내린 눈이 녹았다 얼었다 반복하며 투명하게 반질거리는 얼음으로 바뀐 빙판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혼자였다면 방해꾼들 눈치 보며 움츠리고 걸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지금 친구들과 함께 있다. 벼 밑둥과 빙판은 방해물이 아니라 재미난 놀잇감이다.
깡총거리며 걷다가 어느 논에서 제법 넓은 빙판을 발견한 우리는 가방까지 내려놓고 제대로 논다. 가방에서 꺼낸 책받침을 엉덩이 밑에 깔고 뒤에서 밀어주는 친구 손에 의지해 짧은 빙판 끝까지 미끄러지면 결국 책받침 따로, 나 따로 나동그라진다. 책받침 속 캔디가 아무리 예쁘게 웃어도 나동그라질 땐 웃기다. 한참을 자기가 좋아하는 책받침 스타들과 캐릭터를 깔고 앉아 깔깔거리다 보면 볼이 따끔거린다. 이 논길도 바람 쌩하니 부는 허허벌판인 건 마찬가지. 얼어터질 것 같은 볼을 그보다 더 차가운 손으로 문지르며 모두의 눈길이 향하는 곳은 하나다.
저 앞에 높게 쌓아 놓은 짚가리. 탈곡한 볏단을 산처럼 높이 쌓아놓은 짚가리는 근사한 쉼터다.
언젠가 정말 매섭게 추웠던 어느 등굣길. 논 길 한가운데서 칼바람에 눈이 시려 눈물을 찔끔거리는 나를 보고 1호 언니는 짚가리를 헤집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반대편에 어린아이 하나 들어갈 만큼 공간을 낸 다음 추워하는 나를 그 속에 쏙 넣어주었다. 바람이 들어오지 못하는 공간. 그 잠깐의 쉼으로 다시 걸을 힘을 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부터 짚가리는 우리에게 바람을 피해 가는 방앗간이 되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논길을 지나는 모든 아이들의 방앗간인 짚가리를 향해 달린다.
풀썩 뛰어들어 얼굴만 짚가리 사이에 묻고 바람을 피하는 친구에게 짚단을 들어 울타리를 쳐준다. 1호 언니가 내게 주었던 것처럼 친구에게 '다시 걸을 힘'을 둘러준다.
"아, 따뜻해!"
목청껏 내지른 친구의 사자후에 웃음이 주렁주렁 매달린다.
겨울, 얼어붙은 논 한가운데서 서로에게 짚단을 덮어주며 우리는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