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새겨요
아침을 먹고 난 일요일, 직접 그림을 그리고 가위로 오려낸 종이 인형을 가지고 한참 놀았더니 몸이 근질거린다. 밖에 나가고 싶다. 뭐 놀게 없나 싶어 뒷마당에 있는 창고를 기웃거린다. 온갖 물건들이 모여있는 창고는 가끔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발견하게 되는 보물섬이기도 하다. 농기구는 안되고 고기잡이 물품도 안되고, 만지면 안 되는 것들은 눈으로 건너뛰며 구석구석 뒤지다가 작은 종이상자에서 얼레를 발견했다. 작년 가을 바람 좋은 날 열심히 연 날리다가 줄 끊어먹었던 그 얼레다. 심봤다!
반가운 마음에 찾아낸 얼레를 들고 앞마당으로 뛰어가 소리친다.
"언니야, 연 만들자!"
내 목소리를 들은 언니들 반응은 제각각이다. 득달같이 뛰어나온 3호 언니, 차분하게 일어나 연 만들 한지와 물풀을 찾느라 학용품함을 열고 있는 2호 언니, 그리고 대나무가 필요하니 아빠에게 말해야 한다며 신발을 신는 1호 언니까지. 각자 성격대로 연 만들기 준비에 돌입한다. 나는 막둥이 남동생에게 장난감처럼 빙빙 돌아가는 빈 얼레를 넘기고는 마당에 서 있다. 생각만 해도 입이 헤벌쭉 벌어진다. 오늘은 어떤 연이 만들어지려나.
1호 언니에게 '연 만들기' 소식을 들은 아빠가 짧게 잘린 대나무를 들고 오신다. 아까 창고에선 대나무를 못 봤는데 어디서 구해오신지 모르겠다. '대나무 나와라, 뚝딱!' 하면 나오는 도깨비방망이라도 갖고 있는 건지 아빠에게 말하면 뭐든지 뚝딱 나온다. 그래서 우리에겐 아빠가 도깨비방망이다.
마당에 앉은 아빠가 대나무를 결 따라 쪼개기 시작한다. 칼날이 짧지만 날이 잘 선 단도를 들고서 쓱 내리그으면 대나무가 갈라진다. 아빠 손놀림을 따라 쪼개지고 쪼개지고 쪼개지고, 여러 번 쪼개지던 대나무가 드디어 연을 지지하는 지지대로 쓸 수 있을 만큼 가늘어졌다. '이제 다 됐다.' 싶어 성급하게 손을 내밀어 보지만 아빠는 건네주지 않는다. 납작하게 얇아진 대나무를 살피며 거친 부분을 사포로 살살 문지른다. 아빠 손이 멈출 때까지 다시 얌전히 목을 빼고 앉아 기다린다.
아빠가 탁탁 손을 턴다. 다됐다는 뜻이다. 손질된 대나무를 받아 들고선 방으로 뛰어들어간다. 마지막 재료인 대나무가 도착했으니 재료 준비는 끝이다. 이제 만들기만 하면 된다.
어떤 연을 만들지는 이미 정해졌다. 가오리연을 만들 거다. 가끔 그물에 걸려 올라올 때가 있는 가오리를 보면 깜짝 놀라게 된다. 크기에 한 번 놀라고 배를 뒤집으면 그 귀여운 표정에 또 한 번 놀라고. 이 신기한 생명체를 닮은 가오리 연은 만들기도 쉽다.
1호 언니가 한지 위에 선을 긋는다. 만들 연의 크기를 가늠해 마름모 모양으로 그어주면 2호 언니가 가위를 들고 선대로 살살 자른다. 3호 언니와 나는 옆 날개와 꼬리를 담당한다. 1호 언니가 길쭉하게 그은 선을 따라 자르면 한쪽 팔 길이만 한 날 개 두 개가 똑 떨어진다. 꼬리는 옆 날개보다 좀 더 두껍고 아주아주 길게 만든다. 두께를 맞춰 자른 한지를 여러 개 연결해 팔에 둘둘 감아서 들고 가야 할 만큼 길게. 연 꼬리가 길수록 높이 날고 중심이 잘 잡힌다. 우리 경험상 그렇다. 그래서 꼬리를 최대한 길게 만든다.
다음엔 잘라 놓은 각 부위에 그림을 그린다. 1호 언니는 가오리 눈, 코, 입을 그려 넣고, 2호 언니는 마름모 네 귀퉁이에 무지개를 그린다. 3호 언니는 옆 날개에 알 수 없는 기호를 새기고 막둥이 남동생은 가오리 얼굴에 하트 범벅을 한다. 그리고 나는 긴 꼬리에 내 이름을 쓴다. '은혜은'. 써놓고는 하늘에 높이 올라가도 보이게 굵고 진하게 덧칠한다. 그랬더니 3호 언니도 그 아래 자기 이름을 쓴다. 3호 언니와 둘이 마주 보고 키득거리다가 1호 언니, 2호 언니, 그리고 막둥이 이름도 쓴다. 모두의 이름이 잘 보이게 진하게 새긴다. 다행히 꼬리는 길고 기니 모두의 이름을 새기고 날 수 있다.
그림 그리기가 끝나면 마름모 모양으로 자른 한지에 아빠가 손질해 준 대나무를 붙여야 한다. 그냥 풀로 붙이면 떨어지니 단단하게 붙이려면 한지 조각이 필요하다. 남은 한지를 작은 네모모양으로 여러 개 자른다. 마름모 위에 대나무 대를 대각선으로 두 개 가로질러 놓는다. 그리고 그 위에 작게 자른 한지에 풀을 듬뿍 발라 테이프 붙이듯이 붙여서 고정한다. 풀이 마르면 아주 단단하게 고정된다. 대나무 고정이 끝나면 옆 날개와 긴 꼬리도 풀로 슥슥 붙여준다. 이제 마지막 과정만 남았다. 가장 중요한 얼레 연결하기다.
연에 구멍을 뚫고 실을 연결해 얼레와 고정하는 건 우리가 하긴 좀 힘들다. 할 순 있지만 실을 잘 못 매면 연이 땅으로 곤두박질칠 수도 있으니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하다. 도깨비방망이 아빠가 필요할 때다.
방으로 들어온 아빠는 연에 구멍을 뚫고 실을 연결해 툭툭 당기며 몇 번 위치를 조정하더니 뚝딱 연을 완성했다. 우와! 역시 우리 도깨비방망이다.
신이 나서 완성된 연을 들고나간다. 줄을 바짝 감은 얼레와 연결된 연을 앞에서 들고 뒤에선 긴 꼬리가 땅에 닿을라 둘둘 감아 손에 들고서 으스스한 놀이터(공동묘지)로 향한다.
놀이터에 도착해선 주변에 나무가 없이 뻥 뚫린 곳으로 간다. 그리고 그중 가장 높은 묘 위에 1호 언니가 연을 들고 올라간다. 얼레는 묘 아래 서있는 2호 언니가 잡고 있다. 묘 위에 선 1호 언니가 바람의 방향을 가늠하다가 2호 언니에게 소리친다.
"뛰어!"
그 소리에 아래 서있던 2호 언니가 달린다. 바람을 탄 연이 날아오르며 얼레에 감겨 있던 실이 풀려나간다. 공중에서 몇 번 휘청거리는 연을 줄을 당겼다 풀었다 하며 조련하니 연이 둥실둥실 떠오른다.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휘날리는 옆날개와 꼬리가 하늘에서 춤을 춘다.
땅 위에선 연날리기에 성공한 우리 마음들이 춤을 추고 하늘에선 꼬리에 새긴 이름들이 춤을 추고.
하늘을 나는 맛이 아주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