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고기는 서럽다

마음을 전하는 건 어려워요

by 은혜은

콩나물 무침, 시금치나물, 콩자반, 멸치볶음, 미역줄기볶음, 가지무침, 호박잎 찜, 오징어채, 감자조림, 김구이, 섞박지, 총각김치, 생채, 배추김치, 된장국, 미역국, 게국, 소고기뭇국, 생태탕, 오징어국, 고등어조림, 가자미구이, 새치구이, 양미리조림...... 그리고 가끔 올라오는 닭과 돼지.


우리 집 밥상 위에 번갈아 올라오는 음식들이다. 다른 많은 나물과 채소, 생선들이 있지만 이 친구들이 주연이다.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으니 주연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맛이 없냐고 물으면 그렇지 않다. 자주 먹어도 맛있고 가끔 먹으면 정말 기가 막히게 맛있다. 엄마 손 어디에서 비법양념이 새어 나오는 건지 가끔 확인해보고 싶을 정도다. 고봉밥이 매일 내 입 속으로 눈 깜짝할 새 사라진다. 다만 가끔 먹는 삼계탕에 들어있는 입에서 살살 녹는 닭고기나 연탄불 위에서 기름 떨구며 지글지글 구워지는 삼겹살도 자주 보고 싶다.


오늘은 그런 내 바람이 통한 날이다. 오늘 저녁 메뉴는 고기다. 고기.

시내에 다녀온 엄마가 봐온 장바구니 안에 둘둘 말려 있는 고기를 보는 내 눈에 힘이 들어간다.

"엄마, 오늘 저녁은 고기예요?"

"응, 돼지고기 구워 먹자."

나는 엄마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언니들에게 달려간다. 원래 기다렸다가 먹으면 더 맛있으니 소문을 좀 내줘야 한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오늘 저녁은 삼겹살구이!!

덩달아 신난 바람이 먼저 언니들에게 내 목소리를 전한다.


겨울 해는 빨리 진다. 일하던 아빠도 집으로 돌아오시고 해지기 전에 집에 들어온 우리는 방안을 굴러다니며 고기를 기다린다. 주방에서 냄새가 솔솔 풍기는 걸 보면 저녁이 거의 다 된 것 같다. 참다못해 슬그머니 주방으로 들어간다. 방안으로 들일 소반 위에 저녁 반찬들이 정갈하게 담겨있고 추운 날 그물 손질할 때 손난로로 쓰는 작은 연탄난로 하나도 주방에 들어와 있다. 그 난로 위에서 삼겹살이 소리도 맛있게 구워지고 있다. 소리만큼 맛난 냄새에 침이 꼴깍 넘어간다. 마음 급한 우리를 본 엄마가 소반을 먼저 방으로 들여준다. 식구가 많으니 소반 하나로는 부족해 하나 더. 두 개의 소반을 놓고 나눠 앉는다. 늘 그렇듯이 5남매가 소반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조금 기다리니 고소하고 기름진 냄새를 사방에 풍기며 삼겹살이 상에 오른다. 우와! 삼겹살이다. 바쁘게 고기 한점 씩 집어가는 젓가락들이 행복하다.


어, 한데 뭔가 수상하다. 엄마가 1호 언니만 불러 옆 소반에 앉힌다.

'뭐지? 뭐지?' 좀처럼 없는 일에 젓가락으로 삼겹살을 집으면서도 옆 소반을 흘끗거린다. 가만 보니 옆 소반엔 우리 소반에 없는 게 있다. 구워놓으면 색깔부터 다르니 못 알아볼 리가 없다. '저건 소고긴데!'

그 소고기를 1호 언니 밥 위에 한 점씩 올려준다. 어서 먹으라고 채근하듯 1호 언니가 집어가기 바쁘게 소고기가 올라간다. 안 그래도 작은 접시에 조금만 담겨 있던 소고기가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게 보인다.

'왜 우리 소반엔 없지? 나도 저거 먹고 싶은데.' 생각이 들자마자 말이 튀어 나간다.

"엄마, 나도 소고기 먹고 싶어요."


내 말에 1호 언니 젓가락이 멈칫한다.

내 말에 언니 밥 위에 올려주던 엄마 젓가락이 멈칫한다.

그 반응에 생각 없던 내 젓가락도 멈칫한다. '음, 뭔가 잘못한 것 같은데.'

모두의 젓가락이 분위기를 살피며 멈칫하는 순간, 엄마가 말한다.

"1호가 아파서 돼지고기를 못 먹어. 의사 선생님이 소고기만 먹으라고 해서 언니 것만 조금 샀어. 다음엔 소고기 넉넉하게 사서 다 같이 먹자."

말하는 엄마는 웃고 있는데 평소 웃을 때랑 입꼬리랑 눈꼬리 위치가 좀 다르다. 만화에서 본 웃고 싶지 않은데 웃어야 하는 캐릭터랑 표정이 비슷하다. 엄마는 아마도 속상한 것 같다.


잊고 있었다. 1호 언니가 아프다. 얼굴에서 눈 밖에 안 보일 만큼 커다란 눈에 오뚝한 코를 가진 1호 언니는 누구나 인형 같다고 칭찬할 만큼 예쁘다. 옆집 영희가 매일 자랑하는 바비인형 따위는 비교도 안될 만큼. 그런 1호 언니를 시기했는지 어느 날부터 언니 피부에 뭐가 나기 시작했다. 보기만 해도 간지러워 보이는 빨간 발진이 온몸에 올라왔다. 근처 병원들을 다녀도 차도가 없자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도 다녀오고 더 멀리 부산에도 갔다 왔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완치는 힘들고 열심히 관리해야 하는 병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긴 했지만 그 '관리'에 소고기가 들어가는진 몰랐다. 알았으면 달라고 안 했을 텐데.


멈춰버린 언니 젓가락에게 미안하다. '언니야, 얼른 먹어. 나는 돼지 먹으면 되는데.'

캐릭터에 박제된 엄마 표정에게 미안하다. '엄마, 얼른 언니 밥 위에 올려 줘요. 그리고 속상해하지 마세요.'

말로 전하기 어색한 마음이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씹고 있는 입 속의 반찬들과 함께 소용돌이친다.

그때, 옆에 앉아있던 2호 언니가 내 엉덩이를 쿡쿡 찌른다.

"빨리 돼지 먹어. 안 먹으면 내가 다 먹는다."

2호 언니는 제 말대로 정말 삼겹살을 다 먹어버릴 기세로 열심히 먹는다. 그에 '이때다.' 싶었는지 다들 다시 젓가락을 놀린다. 제 몫의 음식들에 부지런히 오가는 젓가락들을 보며 멈췄던 1호 언니 젓가락도 슬그머니 움직인다.


사실 소고기는 밥 상 위에서 보기 힘드니까 먹어보고 싶었던 거지 나는 삼겹살이 훨씬 맛있다. 이건 진심이다. 하지만 엄마는 모르는 것 같으니까 이따가 엄마에게 가서 말해야겠다.

'엄마, 다음에도 삼겹살 구워주세요. 나는 삼겹살이 더 좋아요.'

마음을 전하는 건 어렵다. 가끔은 누가 내 마음을 그냥 들여다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엄마도, 1호 언니도 그럴까?

오늘은 모두에게 그런 마법이 있었으면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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