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복도 끝에 앉아

by 글희

어떤 시험의 감독을 하러 왔다. 올해로 두 번째다. 작년은 핸드폰이라도 쓸 수 있었지, 올해는 어떤 전자기기도 사용할 수 없는 역할이다. 다행히 시험실 안에 들어가는 감독은 아니어서 수험생들의 중압감, 긴장감에서는 벗어나게 되었다. 내가 견디면 될 건 추위와 지루함 뿐이다.


시험장 건물은 ㄷ자 모양 구조다. ㄷ자의 위아래 가로획에 교실이 줄지어있고, 세로획엔 학년부(교무실)가 있으며 두 꼭짓점에 화장실이 있다. 난 이 화장실 앞을 지킨다. 시험 도중 화장실을 이용하는 수험생이 화장실 안에 쪽지나 컨닝 페이퍼, 전자기기를 숨겨 이용하지 않도록 점검해야 했다. 무려 금속 탐지기로 말이다.


지금 앉은 위치는 ㄷ자 윗꼭짓점이다. 이곳에서 쭉 뻗은 복도 방향을 바라보며 앉아있다. 복도 감독관들의 행동거지가 전부 보인다. 아래 꼭짓점에 앉아 화장실을 지키는 다른 감독관의 앉은 방향은 나를 향해 있다. 기가 막힌 방향이다. 감독들은 수험생뿐 아니라 앉은 방향으로 서로를 감시한다.


강력한 감시 감독 체제가 주는 위압감이 있다. 잘못이 없더라도 움츠러들며 작은 행동도 조심하게 된다. 다만 그 위압감과 긴장감을 주는 장소가 학교인 게 묘하다. 눈앞에 펼쳐진 복도는 볕을 받아 따스하고 평화롭다. 복도에 나있는 창은 먼지와 물때로 뿌옇다. 손걸레로 무심히 닦은 탓에 걸레가 스친 길 따라 먼지 자국이 남았다. 햇볕은 먼지와 물 자국 낀 창을 거쳐 바닥에 닿았다. 오래되어 광택을 잃은 테라조 타일이 햇볕으로 누르스름해졌다.


이곳은 공학일까, 여고일까, 남고일까. 가만히 복도를 바라보다, 학교 이름에 ‘남’이 들어갔다는 이유로 이 복도를 가득 채운 남고생들을 상상했다. 햇살이 적막하던 복도에 웅성거림과 왁자지껄함이 차오른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리니 학생들은 목적지도 없으면서 복도로 몰려나온다. 다 같이 교복을 입고도 누군가는 회색 후드를, 누군가는 검정 집업을 걸쳐 입었다. 위는 교복인데 아래는 회색트레이닝팬츠를 입은 학생도 있다. 웃음 가득한 얼굴은 아닌데도 아- 부럽다.


십수 년간 학교에서 난 학생이었다. 그게 당연했다. 상상 속 왁자지껄함에 속해 있어야 마땅했다. 언젠가부터 난 그 왁자지껄함에서 빠졌고, 멀찌감치서 지켜보게 되었다. 그 변화는 내가 적극적으로 이뤄낸 것이 아니고, 시간이 저절로 이끌어준 결과다. 햇볕은 공기 중에 숨어 떠돌던 먼지들을 밝힌다. 먼지들에 집중하다 보니 퍼뜩. 왁자지껄함이 덧입혀진 복도가 다시 정적으로 돌아온다. 복도를 채우던 학생들은 빛바랜 모습으로 희미해지고, 교복을 입은 18살의 내가 떠오른다. 18살 나에겐 학생 신분이 참 질겼고, 교복은 영원할 것 같았다.


나는 가만히 앉아있고, 상상 속 나는 서서 나를 내려 본다. 멀찌감치 떨어져 봐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생기와 활기, 어리숙한 풋풋함. 상상 속 나는 무게 잡은 무표정이지만 풋풋함이 배시시 배어나온다. 가꾸는 법을 몰라 수더분했다. 외양은 텁텁했지만 그 속은 맑았다. 어른들은 고등학생인 날 부러워했고, 난 어른들을 부러워했다. 나를 응시하는 18살 나는, 어른이 된 나를 과연 부러워할까.


내 세계에 담겨있던 것은 눈앞의 입시와 기숙사에서 시시덕대던 가십거리, 좋아하던 선배에 관한 모든 것. 누가 누구와 싸웠냬- 누가 누구에게 고백했냬- 헤어졌냬- 하는, 지금도 떠들어대는 가십을 빼면 그 당시 수다거리는 모두 미래에서 왔다. 수능만 끝나면- 대학만 들어가면- 으로 시작하는 문장으로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잔뜩 떠들었다. ‘대학만 들어가면- 유토피아’에서는 밤새 술을 마시며 청춘을 즐겼고, 술기운에 힘입어 짝사랑을 고백했고, 그걸 계기로 첫사랑도 이뤄냈다.


그래. 어때? 대학도 들어갔고, 밤새 술도 마셨어. 시나리오대로 고백하진 않았어. 아무렴 뭐 어때- 기숙사에서 좋아하지 않는다며 그렇게 부정했던 그 짝사랑. 첫사랑이 되었어! 미안 지금은 헤어졌어. 너 술은 안 좋아하더라. 네가 친구와 얘기하던 미래들. 벌써 과거가 되었어. 어때. 넌 내가 부럽니?


날 내려다보는 18살의 나는 말이 없다. 시험시간이 10분 남았다는 방송에 퍼뜩. 빈 복도에 덧입혀진 과거의 시선이 사라진다. 햇살은 여전히 따사롭다. 빛바랜 공기가 느리게 부유한다. 복도 감독관은 꾸벅꾸벅 졸고 있다. 시험 도중 화장실을 가는 수험생은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만으로 역할을 다해내고 학교를 나왔다.


난 언제까지 복도를 걸을까. 난 언제까지 학교에 남을까. 당장 이틀 뒤, 난 또 다른 신분으로 교문을 지난다. 항상 학생이었던 학교를 교사로서 다시 걷는다. 학생을 졸업한진 10년인데, 학교를 졸업하진 못한다. 그럼 뭐 어때. 바래져 가는 시간을 학교에 언제까지고 새기고 싶다. 학교와 함께 바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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