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돌아올 곳으로 돌아와야 완성된다
퇴근이다! 여름을 제외한 계절엔 집까지 걸어 걸어 퇴근했다. 올해 여름은 유독 참 질기고 길었다. 11월에 이르러서야 집까지 걸어갈 마음이 생겼다. 오늘 두 발은 하루의 피곤으로 묵직해진 몸을 정류장이 아닌 길거리로 옮긴다. 가을이 공기 무게를 덜어줘서 가능했다. 저녁해도 슬금슬금 퇴근을 준비한다. 구름을 주홍과 분홍 사이로 물들이곤 낮 동안 벌려둔 빛을 조금씩 거둬들인다.
정류장을 지나쳐 대로변으로 향한다. 대로변을 따라 집으로 가는 길은 단순하고 효율적이다. 시간으로 보나 거리로 보나 최단이다. 직진하다 왼쪽으로 딱 한번 꺾으면 그만이다. 왕복 6차선 도로 위 차들은 사람만 나르지 않고 도시의 소음도 함께 나른다. 해는 아직 남았는데, 시간이 되자 켜지는 가로등과 자동차 조명등은 낮 동안 햇빛이 해냈던 일을 대신한다. 또 다른 활기가 시작되려 한다. 하지만 낮의 활기와는 결이 다르다. 그 활기는 도시 특유의 분주함이고 밤을 준비하는 움직임이다.
저녁 도시 활기는 화려하고 시끄럽다. 저녁 대로변 소리는 이동의 목적만을 담고 있다. 생활감 없이 단순하고 효율적이어서 듣는 이를 더욱 날카롭게 찌른다. 건너야 할 횡단보도 앞에서 평소처럼 길을 건너는 대신 왼편으로 꺾었다. 난 오늘 다른 길을 가겠다. 느리더라도 익숙함을 벗어나는 길로. 조금 더 고요한 길로.
대로변에서 멀어지자 무정한 차소리는 멀어지고, 건물의 높이는 낮아진다. 프랜차이즈 카페와 편의점을 지나 마왕족발, 7호선김밥, 병천아우네장터순대 거리로 들어갔다. 나랑 나잇대 비슷해 보이는 청년이 가게 앞에서 만두를 찌고 있다. 솥뚜껑 사이로 뽀얗고 하얀 김이 들썩이며 새어 나온다. 청년은 시장바구니를 끌고 가시는 할머니를 불러 세운다. “어디 갔다 오셔요!” “시장에서 장 보고 가는 길이지!” 푹 쪄진 만두의 모락모락 김냄새나는 대화를 지나간다.
내 앞의 아주머니 두 분은 김장 이야기가 한참이다. 김치를 다 담은 다음, 마른오징어를 잘라 배추 틈에 켜켜이 끼워 넣으면 맛있단다. 결대로 죽죽 찢어지는 김치. 그 사이에 엉킨 마른오징어. 음 맛있겠다. 내 발걸음이 좀 더 빨랐다. 누구네 집 남편 이야기는 작아져 듣지 못했다. 거리에는 단순하고 직선적인 소음 대신 따숩고 정겨운 말소리가 차있었다. 사람들의 발걸음엔 저녁밥을 향한 구수한 기대감이 있었다. 고요함을 찾아 들어온 길목에서 마주한 것은, 고요함이 아닌 복닥거림이었지만, 그 소리는 날카롭기보단 푸근했고 평화로웠다.
틀었던 방향대로 무작정 구르던 발이 잠깐 주춤한다. 이 동네에 나름 오래 살았는데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 핸드폰으로 지도 앱을 열어 내 위치와 갈 길을 확인한다. 문득 일본 여행했을 때가 생각난다. 일본 특유의 감성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녔다. 일본 거리를 거닐 때는 건물 외벽이나 간판, 사물 하나하나를 유심히 보고는 기어코 그 골목의 특색을 찾아냈다. 골목골목에서 뿜어내는 현장감과 생활감을 여행했다.
일본 여행 특유의 감성은 어쩌면, 현장감과 생활감을 찾아내려는 시도와, 찾아낸 것을 온 감각으로 느끼려는 노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한 노력은 퇴근길에서도 할 수 있다. 익숙한 동네의 새로운 골목에서도 그 감성을 찾아낼 수 있다. 우리말 간판이 투박하게 빼곡하다. 할매순대국집에선 혼밥과 혼밥들이 더불어 있다. 문 열린 부동산에선 주인이 손님 아닌 손님과 떠들고 있다. 어린 시절 나도 다녔을법한 화랑태권도, 샛별피아노를 지난다. 평범한 시간대 골목골목엔 여행길의 설렘이 숨어 있었다. 난 그걸 하나하나 찾아냈다. 작은 발견들은 낮시간의 무게를 덜어주고, 시간의 질감을 알려준다. 퇴근 시간의 질감은 막 다 된 밥이 내뿜는 증기 냄새와 맞닿아 있다.
골목 탐험이 끝에 다다른다. 벽돌집이 빼곡한 주택가를 지나면, 집 앞 대로변으로 빠져나오게 된다. 주택 들은 언덕 위에 다닥다닥 붙어있고 도로는 좁고 꼬불댄다. 차는 다니지 않는다. 이제야 고요하다. 벽돌집 중 하나에서 나는 생활 소리나 멀리서 들려오는 말소리 정도만 나직하게 울린다. 그때 오토바이 한 대가 내 옆을 지나간다. 도로 폭이 좁은 탓에 오토바이는 시원하게 내지르지 못하고 배기음은 드릉-드릉-드르릉- 짧게 끊긴다. 나보다 그렇게 빠르지도 않네! 집에 거의 다 와간다.
퇴근이다! 1시간 걸친 여행에서 돌아왔다. 사람 사는 냄새를 꼭꼭 맡고 왔다. 낡은 간판 위 빛바랜 글씨와, 저녁 된장찌개의 구수한 냄새와, 경계 없이 정겨운 수다 소리에서 사람 사는 모양을 다 느끼곤 돌아왔다. 내 흔적을 잔뜩 묻혔고, 앞으로도 묻힐 곳으로. 퇴근길에서 맡은 사는 냄새는 내 공간에 들어와 나의 흔적과 섞인다. 그렇게 섞인 흔적은 또 다른 내 이야기가 된다. 여행은 돌아올 곳으로 돌아와야 비로소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