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두 번 온다

두 번째 가을, 두 번째 <가을>

by 글희

딱 작년 이맘때 쯤부터 글을 썼다. 그 중 가을은 두 번 온다는 글이 있다.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 가을은 정말로 두 번 왔다. 첫 번째 가을은 광복절을 전후로 찾아온다. 하루 아침에 선선한 공기로 여름에 지친 사람들을 홀린다. 그러나 희망을 가진 이들에게 남는 건 여름의 끈적거리는 질척임. 한 여름을 살아낼 때보다도 절망적이다. 대체 여름은 언제 지난단 말인가. 다시 찾아온 온습함에 무력히 지쳐갈 때 즈음, 알게 모르게 두번째 가을이 찾아온다. 이맘때가 되니 여김없이 두번째 가을을 촉각에서부터 맞이한다. 작년에 느꼈던 그대로다.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데, 공기 밀도부터가 낮아 첫번째 가을과는 다르다.

항상 쫓기는 삶이었다. 나의 동력은 뒤에서 쫓아오는 무형의 선이었는데, ‘이만큼은 해내야 한다’는 한계선이었다. 내용은 중요치 않고 다른 사람들 속에 내 위치만을 따지는 선이어서, 내 인생은 쉽게 이리저리 방향을 틀었다. 남들에게 뒤쳐지지 않을 가장 쉬운 길을 택했다. 임용고시를 합격하고 숨 좀 돌리나 했더니, 20대 내내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져버렸다. 목표도 의미도 기댈데도 없는 인생. 덧없는 공허. 잃어버린 사랑. 한참을 허덕이다 쓴게 <가을>이다.

<가을>을 시작으로 난 글쓰기에 홀딱 빠졌다. 내가 경험하는 감각을 문장으로 쓰고나면 나면 속이 시원했다. 그래 내가 느낀건 이거야. ‘이거’라고 뭉뜽그려진 가닥가닥이 명료해지면 나 또한 경쾌해졌다. 내가 쓴 글을 내가 낳은 자식 자랑하듯 자랑했다.

그 이후로 일년은 내가 글을 써야만 하는 사람인 것처럼 굴었다. 질척이고 무거운 여름 공기만큼 권태가 나를 끈덕지게 짓눌렀을 때, 글쓰는 시간만이 나를 해방시켰다. 해방감이 좋았다. 언제든 도망칠 수 있는 안식처였다. 나는 글을 써야하는 구나.

지난 토요일엔 장댓비가 내렸다. 얼마나 세차던지 창문을 닫았는데도 빗소리가 새어 들렸다. 깜짝 놀라 비구경을 나갔다. 비는 그 형태가 눈에 보일만큼 완고한 직선으로 쭉쭉 뻗어 내렸다. 세차고 시원시원하니 바닥에 쏟아졌다. 어디 계단 둔턱이라도 있으면 거기 앉아 구경할랬건만, 지붕이 없어 앉을 수가 없었고, 가만히 보고 있자니 다리가 계속 가려워 금방 돌아왔다. 그 짧은 사이에 모기에 잔뜩 물렸던 것이다! 이제는 모기가 나와야 가을이구나 한다. 모기도 한여름의 뜨거움 속에선 꽁무니도 내놓지 않는다.

일년 전 허덕이던 권태와 덧없음에 여전히 허덕이고 있다. 얼음을 가득 채운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모기에 물린 무릎 뒤를 벅벅 긁는다. 팔에 물린 모기 자국은 이미 대차게 긁어 흉터로 남았다. 다른 한 손으로는 스크롤을 내리며 지난 글을 읽는다. 벌써 일년이 지난 글. 작년 글을 읽고 있으면 지금과 다른게 있나 싶다. 잃어버린 1년. 나의 젊음.

오늘 본 책에서 ‘사공 없는 나룻배가 기슭에 닿듯 살다보면 도달하게 되는 어딘가가 미래’라는 문장을 읽었다. 꼭 나처럼 방향도 모르고 기슭에 닿듯 살아도 미래에 도달할 수 있다니. 위안이 된다. 나도 ‘지금의 나’는 모르는 ‘나’에 언젠가 도달하겠네. 도달한다는 말은 어폐가 있다. ‘나’는 시시각각 변하여 고정된 상태로 서술될 수 없다. 잃어버린 1년이랬지만, 지금과 다른게 있나- 작년이랑 똑같네- 들이 한해 한해 모이면 전혀 다른 새해에 도달하게 됨을 나는 안다. 전혀 다른 새해는 몰라도, 곧 두번째 가을엔 도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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