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곁에 길 잃은 작은 시간 속에' '쉼 없이 흘러가는 시간 이대로 보낼 수는 없잖아' '넘쳐 버릴 듯한 불안에 눈물을 감춘 어제에' '나를 허락해준 세상이란 손쉽게 다가오는 편하고도 감미로운 공간이 아냐'
이 문장들이 익숙하신가요? 익숙하다면 저랑 비슷한 세대이실 겁니다. 모두 만화 ost의 가사입니다. 각각 <이누야샤> <원피스> <명탐정코난> <디지몬어드벤처>를 열고 닫은 노래들입니다.
이 만화를 보고 노래를 따라 불렀던 건 초등학생 때입니다. 쉼 없이 흘러가다 길 잃은 작은 시간을, 넘쳐 버릴 듯한 불안과 눈물을 감춘 어제를, 나를 허락하였으나 감미롭지는 않은 세상을, 어린 저는 이해하였을까요. 그 당시 어린이들은 이해하였을까요.
만화 주제가들을 가만히 듣다 보면 사랑, 우정, 꿈, 희망, 용기 등 추상적인 가치를 노래한 가사가 많습니다. 정작 그 노래를 듣는 주 연령층은 깊이 있게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입니다. 어디에선가 만화 주제가에 추상적인 가사가 많은 이유에는, 노래를 듣고 자란 어린이들이 어른이 되어 노래를 다시 들었을 때 위로를 얻으라는 의도가 있음을 들었습니다. 의도는 적중한 듯합니다. 유튜브에 그 시절 만화 노래들을 검색하면 향수에 젖어 울컥한 댓글들이 가득합니다.
사랑과 우정, 꿈과 희망, 용기와 도전 이런 단어들은 무모하게 순수합니다. 만화와 멀어지는 나이 즈음부터 경쟁, 성적, 결과, 현실, 스펙, 실패 같은 단어와 가까워집니다. '나를 허락해준 세상이란 손쉽게 다가오는 편하고도 감미로운 공간이 아냐' 라는 가사처럼, 꿈과 희망을 품고, 사랑과 우정을 지키며, 항상 용기 있게 도전하기엔 현실이 매섭습니다.
어렸을 때는 만화에서 노래하는 가치들이 유치하고 착하기만한 뻔한 이야기라고 무시했는데, 지금 보면 순수함을 지킨다는 것은 정말 강한 것입니다. 사랑을 알기 위해선 미디어에서 주입된 연애 롤을 성찰하고, 상대에게 투사하는 나의 욕망을 직면할 줄 알아야 합니다. 믿었던 마음에 배신당하고, 상대의 마음과 내 마음은 같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마음을 나누는 소중함을 알고 또 한 번 믿어야 사랑을 지킬 수 있습니다.
다른 것들도 너무나 어렵습니다. 질투와 부러움이 뒤섞인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타인의 소중함을 느낄 때 우정을 지킬 수 있고, 내가 정말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꿈과 야망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순수함은, 내 마음은 사실 못나고 미운 구석이 많음을 알게 되면서,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좌절하면서 깎여나갑니다. 갈고닦아집니다. 어른이 되어 간직하는 순수함은 그렇기에 강합니다.
전 아직도 만화를 봅니다. 명탐정 코난을 15년 넘게 애정하는 애청자입니다. 만화 노래도 여전히 듣습니다. 울컥해하며 위로받는 사람 중 한 명입니다. 주로 운동할 때 듣기는 합니다만, 가사들을 하나하나 잘근잘근 씹어 들을 때도 있습니다. 나는 못해내는 것들을 용기 있게 헤쳐나가는 만화 속 주인공들을 보며, 이런 감성에서 너무 멀어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Every heart-보아> <우리의꿈-코요태> <바람의라라라-유리> <Butterfly-전영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