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이야기 1. 끝내려는 용기

2부. 사랑과 용기

by 글희

아침에 일어나서 확인한 ‘잘잤어’ 문자가 천진난만해서 지긋지긋 했다. 우리 주위를 끈덕지게 감돌던 권태에 대해 얘기한 게 어제였다. 난 아직 할 얘기가 더 남았는데, 무엇이 미안한지 모르겠는 사과를 받고 일단락 됐었다.


술 한잔 걸치고, 미묘하게 어긋난 분위기를 꺼내 나눴다는 것만으로 그는 가벼워 보였다. 무거운 짐 하나를 덜어냈단 듯이, 불쌍한 고양이가 짓는 표정으로 사과를 건네니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봐도 그는 잘못한게 없었다. 그의 사과는 갈등을 마무리하자는 사인이었다. 내 마음 속엔 해소되지 않은 어긋남이 자리했지만 상대방은 다 털어버린 것 같으니 장단을 맞췄다.

그러나 다음날이 되어 아무일 없단 것처럼 구는 메세지에 장단 맞춰 답하기가 싫었다. 사실 모르겠다. 어떤 메세지가 와야 흡족했을지. 화해 다음날 아침부터 속 긁을 소리를 해선 안 될 것 같아 넘겼다. 그러다가 저녁 때 쯤 “오빤 요즘 나에 대한 마음이 어때?” 하고 물어봤는데

- 옛날보다 더 사랑해

란다. 싸해진 피가 손끝까지 저릿하게 흘렀다. 이토록 투명한 거짓은 없었다. 로맨틱한 선언이 너무 공허해 보였다. 명백한 거짓을 말하는 모양에, 불안과 심란함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날 밤 나는, 사실 난 우리의 갈등이 전혀 해소가 되지 않았다고 문자로 털어놨다.

- 나 이제 지쳐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답을 받았다. 지친다는 말은 무력해서 절망스러웠지만, 솔직해서 덜 혼란했다. 우리 둘다 지쳤다. 잠시 관계에서 나는 모든 잡음을 끄고 싶었다.

- 우리 시간을 갖는 건 어때


나의 시간을 갖자는 제안은 반려없이 통과되었다. 순조로운 일시정지가 외려 불안했다. 내 제안에 한번쯤은 잡음이 나고 걸림이 있기를 바랐는데 모든 과정이 매끄러웠다.

7년만에 맞이한 혼자의 기간은 의외로 고통스럽지 않았다. 상대를 끄고 나만 생각할 수 있었다. 불안하면 걷는 습관이 있는데 사흘간 하염없이 걸었다. 집 앞 정릉천을 걷다가 청계천까지 걸었다. 2시간이고 3시간이고 생각하며 걸었는데 그 동안 내가 나에게 던졌던 질문은 이거다.

‘난 뭘 원하는 걸까’

시간을 갖기로 한 마지막 날엔 벚꽃이 만개했다. 직장 동료들과 중랑천 벚꽃길을 걸으며 애써 웃어 보였다. 꽃받침 자세로 찍은 사진 속 한 손에는 반지가 빛났다. 배경엔 풍성한 벚꽃이 눈부셨다. 내 사랑은 피기 보다 지고 있었는데. 봄의 찬란함이 서글펐다.

나는 사랑이 재밌고 행복하기를 원했다. 내가 애쓰지 않아도, 항상 사랑받음을 충만히 느끼길 바랐다. 나도 행복하게 사랑을 듬뿍 받으며 연애하고 싶다고 속으로 울며 중얼거렸다.

‘나는 행복하길 바랐는데, 지금은 행복하지가 않아’

그의 애정은 내가 살펴봐야 알 수 있었다. ‘오늘 내가 말 안했는데 먼저 사랑한다 말했네?’ ‘오늘은 내내 덤덤했지만 아까 볼 끄집어댕긴거 봐. 나에게 여전히 장난스러워’ 여전히 날 좋아한다는 확인을 받고 싶어서 난 덫을 놓았고, 덫은 항상 우리 주위를 감돌았다.

덫은 출제자가 긴장하고 수험자가 지치는 묘한 시험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데이트를 마치고 헤어지기 전, 나는 일부러 그를 안지 않고, 그가 나를 먼저 안아주는지 지켜본다. 그가 나를 안아주면 안심했고, 그가 나를 안지 않으면? 그는 덫에 걸린 것이다.

덫에 걸리면, 난 그의 애정을 의심하고 의기소침해진다. 몇 번 반복되면 서운하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덫에 걸린 포옹은 사랑이 아니라 시험의 정답이 되어버려서 이후엔 그가 먼저 안아도 애정을 확인받지 못하는 것이다.

상대를 시험하여 애정을 확인 받는 행위가 얼마나 미숙한진 알고 있다. 내 부족을 변명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덫을 놓는 습관에는 두 명의 책임이 있다.

사랑은 살아있는 식물과 같았다. 나는 계속 물을 주는데 그는 흙을 만지지도 않았다. 가끔 다 자란 식물을 예뻐라만 할 뿐. 억울함은 의구심으로 이어진다. ‘왜 이걸 나만하지? 나만큼 좋아하지 않는걸까?’ 의구심은 곧잘 은밀한 테스트로 이어졌다.


‘내가 안하면 너가 하겠지? 너도 우리가 소중하다면 말이야. 너도 나를 나만큼이나 좋아한다면 말이야!’ 이 독백들이 우리 관계를 진창에 끌고 갔다. 사랑은 서서히 끈끈히 늪으로 꺼졌다.

‘그래 난 행복하고 싶어’

나를 향한 마음이 진실된 것을 넘어, 나를 향한 마음을 요구 없이도 실천하길 바랐다. 그쯤 되어야 행복할 것 같았다.


행복과 함께함은 양립할 수 없어 보였다.

우리는 끝나야만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7년의 관성을 끊어야 했다.

끝내려는 용기는 내 행복을 위한 발악이었다.

끝내려고 했다. 끝내기 전에 끝날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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