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약을 먹어야 한다는 괴로움

by 선데이

처방전을 들고 병원 옆 약국에 들렀다. 약은 하루 두 번, 아침과 저녁 식후. 시간을 지켜 먹어야 했다. 두 달 치 약봉투는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대부분 50대로 보이거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었다. 비닐봉지 가득 약을 들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 같은 30대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약봉투를 몇 번이나 들여다봤다. 그 안에는 약만 들어 있는 게 아니었다. 앞으로의 식단, 운동, 생활 습관, 그리고 다시 시작될 숫자 관리까지 내가 감당해야 할 시간들이 함께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집에 오자마자 서랍 깊숙이 넣어 두었던 혈당계를 꺼냈다. 아기가 태어나며 한동안 잊고 지냈던 물건이었다. 다시 마주한 혈당계가 왜 이렇게 반갑지 않은지. 손끝을 찌르려니 벌써부터 아릿한 느낌이 올라왔다. 물론 그렇게 아프지는 않다. 피가 맺히는 순간의 따끔함이 전부다. 그럼에도 한동안 멀리했던 일을 다시 시작하려니 괜히 더 크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혈당계를 들여다보니, 임신했을 때 하루에 일곱 번씩이나 이걸 해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약을 먹는 일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물 한 컵이면 충분했고, 몇 초면 끝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몇 초가 하루 중 가장 길게 느껴졌다. 약을 삼킬 때마다 한 가지 사실을 다시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약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이 오늘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 임신성 당뇨 때 맞던 인슐린 주사에 비하면 훨씬 수월한 일이었지만, 마음의 무게는 오히려 더 무거웠다. 주사는 언젠가 끝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 약은 ‘언제까지’라는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임신성 당뇨 때도 처음에는 비슷했다. 왜 하필 나인지,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스스로를 탓하다가도 어느 순간부터는 숫자에 맞춰 식사를 하고, 걸음을 늘리고, 하루를 조심스럽게 살아냈다. 그때의 나는 꽤 단단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를 자꾸 주저앉게 했다.


15개월 된 아이는 내가 약을 먹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봤다. 혹시라도 아이가 약을 만지다 입에 넣을까 봐, 항상 높은 곳에 올려두고 아이가 보지 않을 때 몰래 약을 먹었다. 당뇨가 당장 생명을 위협하는 병은 아니라고들 말하지만, 아이를 보고 있으면 괜히 서러워졌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마음이 걸렸다. 혹시 남편이 나를 부끄러워하지는 않을까. 나는 남편에게 시부모님이나 친구들에게는 말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당뇨 환자가 된 나는, 여전히 내가 당뇨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휴대폰 의료정보에 있는 복용중인 약에 이 사실을 적어야 할지도 한참을 망설였다. 응급 상황을 생각하면 적어두는 게 맞겠지만, 선뜻 ‘당뇨’라는 글씨에 손이 가지 않았다. 창피해서일까. 아니면 아직 완전히 인정하지 못해서일까. 적지 않는다고 해서 이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결국 아무것도 적지 못한 채 핸드폰 화면을 껐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약을 먹기 시작하고 일주일쯤 지나자 몸이 달라졌다.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몸이 조금씩 가벼워졌다. 그동안 미뤄두었던 싱크대 정리를 했고, 남편이 하던 화장실 청소도 내가 직접 했다. 심지어 베란다 창문까지 닦았다. 흐린 눈으로 외면하던 집안의 구석구석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문득 생각이 들었다. 아, 나는 무기력한 사람이 아니었구나.


하지만 달라지지 않는 것도 있다. 오늘도 나는 당뇨약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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