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를 만나다
처음 만난 삐삐는 동네 미장원에 사는 귀여운 강아지에 불과했다.
나에게 15여 년을 함께 살던 자식이나 다름없는 제이피가 떠난 후 3년 정도가 지난 즈음이었다.
나는 사랑하는 강아지와 헤어지는 슬픔이 너무 커서 다시는 개를 기르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고 있었다.
매해 하와이에 사는 큰 딸을 만나러 갔는데
보통 2주 정도를 머물다 오기에 개를 데리고 살기 힘들뿐더러 내 인생에 개는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식구는 모두 그 미장원을 다녔다.
처음엔 작은 딸이 다녔고 그 미장원에 귀여운 개가 있다고 하여 남편과 내가 몇 번 가게 되었다.
미장원 주인이 기르는 개로 비숑과 몰티즈가 섞인 종류로
그저 남의 집 귀여운 강아지에 불과해서 바라볼 뿐이었다.
그 아이는 대부분의 시간을 미장원의 유리 테이블 위에서 잠을 잤는데
처음 봤을 때 그 강아지는 마치 인형 같았다.
제이피는 중형 견인데다 초콜릿 빛의 어두운 털 색깔을 지닌 개였고
13살이 지난 후에는 나이가 들어 거의 잠만 자는 무기력한 늙은 모습으로 지냈다.
그에 비해서 삐삐는 하얀 털에 눈과 코가 새까만 어린 강아지로 제이피 덩치의 절반 정도도 안 되는
작고 예쁜 강아지였다.
특히 손님이 오면 높은 테이블에 올려놓고 잠만 재우는데
첫눈에 볼 때 저런 개는 얌전해서 10마리도 데리고 살 수 있겠다 생각했다.
간혹 밑에 내려놓으면 내 손을 물어뜯고 장난을 쳤는데 남편이 갈 때도 그랬다고 한다.
어느 날 내가 펌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개가 짖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가 보니 미장원 한편 구석에서 불기둥이 보였다.
여름이 아니라 에어컨을 켜고 있었던 것은 아닌데 아마도 바깥의 에어컨 박스 쪽의 합선으로 불이 붙은 것 같다.
다급하게 미장원 원장이 119에 전화를 걸었고
난 순간 파마 약을 뒤집어쓴 채 밖으로 뛰어 나가야 하나 마나 주춤거리고 있었다.
다행히 소방대원이 오기 직전에 불이 꺼졌고 그 난리 통에 내 머리도 끝이 났다.
계산을 하면서 이번 일은 전적으로 개가 짖는 바람에 불 난 사실을 빨리 알아차린 덕분이라고 개를 칭찬해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일로 삐삐를 다시 보거나 데리고 올 생각을 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 생각하면 언제나 삐삐는 내게 수호천사 같은 존재였다.
어느 날 남편은 원장이 삐삐를 주겠다고 하는 말을 전하며
우리가 데리고 올까? 하며 물었고 나와 작은 딸은 반대했다.
딸은 주인이 있는 개를 데리고 올 바엔 유기견을 키우라고 했고,
나는 아직 다른 개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마침 그때 큰 딸 졸업식에 참석할 계획으로 출국 날짜도 정해진 때라 일단 다녀온 후 입양을 결정하기로 하고 떠났다.
하와이에 지내는 동안 남편은 우리가 없는 동안 혹시나 다른 사람에게 삐삐를 줄까 봐 안절부절못했고,
한국으로 전화까지 하며 삐삐를 데리고 오고 싶어 했다.
그리고 2010년 8월 11일 드디어 삐삐가 우리 집에 왔다.
첫날 삐삐는 미장원 원장이 안고 같이 우리 집에 들어왔다.
혼자 온 것이 아니라 삐삐도 두려워하는 눈치가 아니었고 잠시 뒤 거실에 똥을 쌌다.
원장이 미안해하면서 치우려고 해서
“이제 내 집 아이니까 내가 치워야죠.” 하며 휴지를 꺼내 집었는데 순간 냄새가 코를 찌르며 속이 울렁거렸다.
제이피를 기르는 동안 한 번도 그런 불쾌한 느낌이 없었는데
아마도 처음이라 온전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다.
원장은 삐삐를 남겨두고 집을 나가 버렸고 삐삐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삐삐를 내가 위로해주었다. “이제 여기가 네 집이야.”라고...
개 입장에서는 순간적으로 모든 것이 달라졌는데 낯선 환경, 낯선 사람과 지내야 하는 삐삐를 배려해서
이름도 그대로 삐삐로 쓰기로 했다.
첫날은 거실 소파에서 아빠와 잤는데 높은 테이블에서 지내던 습관의 삐삐는
소파 꼭대기 위에서 지내거나 소파 안으로 머리를 묻는 것으로 이어졌다.
나중에 삐삐를 데리고 살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미장원에서 종일 잠만 자고 얌전하다고 생각한 건 오산이었다.
손님들 중 개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으니 일부로 뛰어내리지 못하는 높은 유리 테이블에 올려 두었고
거기서 그저 잠만 자면서 시간만 보내고 산책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는 아이였다.
미장원에 엄마를 따라오는 꼬마 손님들에게 늘 시달렸고,
삐삐는 아마도 우울증을 앓았던 것 같다.
나는 아침마다 운동을 하러 피트니스 센터에 갔는데
첫날 혼자 남겨진 삐삐가 집에 돌아오는 나를 보고 끙끙 거리며 반겨주었다.
삐삐의 작은 신음 소리가 묘하게 나를 감동시켰다.
비로소 내가 잘 데리고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기고
그 날부터 나는 완전한 내 아이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삐삐는 영원한 나의 수호천사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