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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시퀸 이지 Jan 16. 2023

내가 왜 그랬는지 이제 알겠다

몸이 나를 위로한다

난 왜 그토록 공중부양에 열광했던 걸까.


자식 여의살이 시키고 이제 인생 좀 즐겨보자, 는 심보마냥 아픈 몸 적당히 땜질 하니 노동에서 벗어난 운동에 기웃댄다. 헬스를 슬슬 분가시킬 참이었다. 41살에 만났으니 뜨거운 사랑을 영원히 불태우지는 못하겠고. 내 안의 욕구와 호기심 따라 체험수업에 나섰다. 낚였다. 학원에서 코 낀 게 아니라 내가 나를 옭아 맸다.


폴댄스에 가슴이 뛰었고 플라잉요가에 설렜으며 클라이밍에 흥분했다. 46살에 신입생이 된 필라테스 마저 몸이 붕~ 뜨는 동작에 전율을 느꼈다. 여운이 오래가고 자꾸만 생각나고 기다려지게 하는 건 왜일까, 하던 중 남희경의 <몸이 나를 위로한다>를 만났다.  





책을 읽기 전에는 팔 힘과 음악, 나무 위로 올라가던 인간의 본능이려니 했다. 저자는 국내외 심리치료사 답게 12가지 몸을 풀었는데 유독 [퇴행하는 몸]부터 눈에 들어왔다. 간지를 한 장 딱 펼치면 '내면의 리듬에 귀 기울이는 것은 자기위로의 출발이다'라는 문장과 '결핍,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상처'라는 소제목이 등장한다.


내가 직업 전선에 뛰어들기 전까지 방을 벗어나면 신발을 신어야 했다. 네 가족 신발이 부엌을 한 몫 차지했지만 부엌이 집 안에 들어앉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자던 중 배라도 아프면 어둠을 가르며 돌아 돌아 공중 화장실까지 가는 것보다는 짧은 동선이 훨씬 나았다. 득실대는 좀도둑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것도 괜찮은 행보였다.


직장에도 들어가고 결혼도 하고 부엌과 화장실도 집 안으로 들어왔다. 맨발로 집안을 드나들 수 있다는 현실이 믿기지가 않아 꿈 속을 걷는 것만 같았다. 발이 땅에 닿지 않는 운동이 자꾸만 끌렸던 건 나를 끌어올린 무쇠팔 만은 아니었다. 지하실방과 신발에 대한 번거로움이 몸 속 세포 어딘가의 이끼였나 보다.   


발이 위로 둥둥 뜰 때 운동에 대한 희열 보다는 몸이 나를 위로했던 것이다. '운동' 학원을 간다기보다 어떤 '예술'을 펼칠까란 생각이 많이 든 것도 결핍의 신체화가 아니었을까. 책에서도 놀이의 반대는 우울이라며 "정서적 결핍으로 나타나는 증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마음껏 놀 수 있어야 하고, 자유롭게 퇴행할 수 있어야 한다"했다. '놀이'는 성장을 위한 퇴행이라 강조 했다.  


그럼 그렇지. 이유 없는 선택 없고 배경 없는 결과 없다. 그때 그 점이 지금의 점과 연결된...다는, 스티브 잡스가 괜한 소리 했겠나. 어려서 쌓은 배경 덕에 이 나이에 신나는 '놀잇감'도 얻었다.


또 어디에 발 붙일 '먹잇감'이 나타나려나. 발이 또 뜨려나.

운동을 뭘 할지 찾고 있는 우리 인턴들 어디로 안내할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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