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푸시퀸 이지 Feb 06. 2023

중증 감염자, 아버지의 책 출간 계약 소식

'띠링' 메일이 왔다. 첨부파일은 출간 계약서. 필명도 나처럼 두 글자인 '이욱'. 한 지붕 밑에 살면서 이렇게나 조용히 책 한 권이 뚝 떨어지는 경우도 있나.


"아빠, 혹시 출간 계약 했남?"

(철 없는 딸이라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여전히 '아빠')


"응"

딱 한 글자로 출간 소식은 끝났다. 난 그 한마디조차 잇지 못했다. 기쁨 보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그리고는 출간 계약 후 아부지 투고 글을 출근길에 간간히 펼쳐 보았다. 입은 더 꽁꽁 얼어 붙고 말았다. 말주변 없는 집안 내력 답게.


내가 출간 계약을 맺은 후 아부지는 출판사 투고는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을 했었다. 출판사가 수많은 메일 더미에서 열어보게 하려면 출간기획서가 관건이라고만 하고는 시일이 흘렀다. 나름 친절을 베푼답시고 내 출간기획서 PPT 대신 한글 서식을 보내드렸다. 바쁘다는 핑계로 시간은 그대로 흐르고.


80을 바라보는 나이에 기획 보고서를 운운한 것, 기획서 아니면 글을 열어 보지도 않는다고 내뱉은 것, 바쁘다는 핑계로 정겹게 도와드리지도 못한 것에 아버지 글이 포개졌다.


이렇게 살았구나. 그래서 그런 마음, 그런 말, 그런 행동들이 나왔구나.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 얼마나 힘들셨을까. 회사는 거의 다 와 가는데, 전철에서 곧 내려야 하는데, 몸 속의 수분들이 눈으로 역류질을 했다. 


살아 계실 때 잘 할 걸, 하는 마음 예습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끝내 전하지 못한, 출간 계약 축하 인사는 아버지 책 마지막장에 슬며시 넣으련다.


365일 탄천길을 2시간 걸으며 매일 사진 하나, 글 하나를 카톡으로 보내시는 아버지.

내 첫 책 출판기념회 때 발표하신 아버지 글로 마무리한다. 

칠순, 팔순 잔치는 못 해드려도 아부지 출판기념회는 꼭 해드리고 싶다. 

* 불효녀는 2월, 아부지는 4-5월에 책 출간 예정 






< 출판기념회 때 아버지의 발표 글 >


안녕하십니까? 저는 저자의 아비 되는 사람입니다. 태풍 전야에 불안한 날씨임에도 이렇게 많이 와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런 자리에서는 좋은 말을 해야 하는데 아비로서 그러면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말을 듣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쓴 소리를 좀 할까 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출판기념회 하신다면서요. 마침내 책을 내셨군요.” “아닙니다. 제 딸애입니다.” “아이고, 따님이 아버지를 닮아 글을 잘 쓰나봅니다.” 

이래 들어도 저래 들어도 듣기 좋은 소리입니다. 하지만 저는 시큰둥합니다. 요즘 딸애는 걸을 때 발이 땅에 닿지 않습니다. 입은 귀에 걸렸습니다. 그것도 눈에 거슬립니다. 

‘마침내’라는 말이 함축하듯이 저는 오래 전부터 책을 낼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려고 스스로 인생의 맨 밑바닥으로 내려가 보기도 했습니다. 


몇 년 전, 서울성모병원에 청소부로 들어갔습니다. 260여 명의 청소부 중 가장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가장 힘든 야간청소부를 자청해 겪지 않을 일도 겪었습니다. 

청소부가 하는 일이 바닥과의 싸움입니다. 일이 바닥이요, 사람도 바닥입니다. 미화원이라는 말로 미화를 한다 해서 본질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퇴근해서 잠을 자는데 뚜르르 전화가 왔습니다. 대뜸 지난밤 작업 중에 혹시 냉장고 문을 열었느냐고 묻습니다. 

직감했습니다. 이 물음은 냉장고에서 뭔가가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저를 의심한다는 뜻입니다. 평생 이런 의심은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대충 이야기를 끝내고 전쟁에 임하듯이 단단히 벼르고 출근했습니다. 다음에 벌어진 일은 더 황당합니다. 저는 전쟁을 하자는데 저쪽은 평화를 들고 나옵니다. 

속셈을 알아챘습니다. 냉장고에서 없어졌다는 것이 간식거리였습니다. 청소부가 밤중에 출출해서 꺼내 먹었을 거라고 추론한 것이고 저를 의심한 것입니다. 

관용을 베풀 듯이 없던 일로 했지만 이미 낙인이 된 주홍글씨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용솟음쳤습니다. 그래, 갚아야지, 되갚아 줘야지. 

똑같이 쩨쩨하게 대항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한 달 봉급을 걸었습니다. 청소부 봉급이래야 빤하지만 그래도 한 달 동안 흘린 땀의 대가입니다. 병원에 기탁하면서 형편이 어려운 환자를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이겼습니다. 스트레스가 훅하고 날아갔습니다. 때마침 병원 홍보실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미담 기사로 신문에 싣겠다고 했습니다.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병원장이 차나 한 잔 하자고 요청해 왔습니다. 병원장은 청소부에게 하늘같은 존재입니다. 용역 소속이었던 저를 병원 직속으로 바꿀 수도 있는 분입니다. 거절했습니다.

거절할 때마다 희열이 느껴졌습니다. 그때는 제가 갑이었습니다. 


70년을 넘게 살다보니 이런 이야기가 산처럼 쌓였습니다. 게다가 저는 27년 동안 매달 동문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꺼져가는 동문회를 살려냈습니다.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결과는 제가 가장 큰 수혜자였습니다. 우유를 받아먹는 사람보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하듯이 문장 수련을 톡톡히 쌓았습니다. 

이러면 준비된 작가 아닙니까. 우물쭈물하는 사이 딸애가 선수를 쳤습니다. 이 문제는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는 제 불찰로 돌리겠습니다. 


또 있습니다. 말씀을 드리기 전에 여러분에게 한 가지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저를 자세히 좀 관찰해 주십시오. 우락부락하게 생겼습니까? 성깔 있게 생겼습니까? 

대부분 침묵하십니다. 침묵이 금입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은 참으로 안목이 높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순한 양은 아니지만 교활한 여우거나 사나운 이리는 아닙니다. 

그런데 딸애는 책에다 저를 마치 싸움꾼인 것처럼 묘사했습니다. 솔직히 부부간에 약간씩 토닥거리지 않는 집안이 있습니까. 


노름을 좋아하는 사람이 노름판에 끼지 않으면 패가망신은 하지 않습니다. 집안 식구끼리 붙어봐야 따도 잃어도 돈은 집 안에 있다는 것을 압니다. 

마찬가지로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저자거리 싸움판에 끼지 않으면 경찰서에 출입할 일은 없습니다. 집 안에서 토닥거려봐야 칼로 물 베기 아닙니까. 


변명으로 들릴까봐 조심스럽습니다만, 어두운 시기가 있었습니다. 부도로 아파트 두 채가 허공으로 날아갔습니다. 한강으로 달려갈 상황이었지만 노래방으로 달려가 위기를 넘겼습니다. 

딸애는 이런 사정을 모릅니다. 그런데 딸애는 이 시기를 책의 배경으로 잘도 활용했더군요. 그러면 딸애가 가장 큰 수혜자가 아닙니까? 

딸애는 자라면서 교통사고를 두 번 당했습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목숨을 건졌습니다. 저는 누구보다 그런 딸애를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그 마음을 조금은 아는지 책 뒷부분에서는 조금 마사지를 했더라고요. 


거기 보태서 저도 칭찬 한마디를 하겠습니다. 두 번 죽을 고비를 넘긴 딸애는 그 후 악바리로 변신했습니다. 갈수록 중증입니다. 일인사역, 오역을 하면서 잠은 언제 자는지 궁금합니다. 

책을 쓰는 도중 두 달 반가량 회사 일로 중단이 됐습니다. 대개 글은 쓰다 중단하면 맥이 끊어집니다.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합니다. 그러면 애초에 계획했던 것과 전혀 다른 글이 될 수도 있습니다. 딸애는 그 고비를 잘 극복했습니다. 


평생에 책을 한 권도 안 낸 사람은 있어도 한 권 내고 마는 사람은 없습니다. 딸애는 지금 이 순간에도 뭔가를 궁리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도 오기가 생겼습니다. 이번에는 새치기를 당하지 않겠습니다. 내년에는 딸과 아버지가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출판기념회를 하는 진풍경이 벌어질지 모르겠습니다. 

털어놓고 나니 속이 후련합니다.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은 시간 즐겁고 행복한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 첫 책 출판기념회 ]

* 회사 사람들 못 찾아 올까봐 필명 대신 실명 사용 


매거진의 이전글 아직도 필사 하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