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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시퀸 이지 Jul 23. 2020

 ‘미’ 치고 ‘파’ 치는 요즘, 재미가 ‘솔솔’

- 어쩌다 마주친 그대, 그대 이름은 줌바, 줌바, 줌바 -


‘어쩌다’란 말이 어쩌다가 유행이 되었다, ‘어쩌다 어른’이란 TV 프로그램 영향인지 ‘어쩌다’ 시리즈가 즐비하다. 어른이든 어버이든 간에 대개는 새로 받은 역할에 ‘어쩌다’를 붙인다. 난 시작부터 그 단어를 차용했다. 이 세상에 ‘어쩌다’ 태어났다. 부모님, 두 사람 겨우 들어가는 단칸방에서 이래저래 우선순위에 떠밀려 엄마 뱃속에서 죽을 운명이었다. 글의 주인공은 ‘나’인데 자칫 부모가 될 수 있으니 그 이야기는 이쯤으로 해두자.


아무튼 난 그 누구의 의지와 관계없이 발아했다. 없던 일로 하는 도 미수에 그쳐 얼떨결에 태어났다. 눈치 없이 태어나서 그런가. 아님 성인이 될 때까지 남의집살이로 터득한 개인기인가. 눈칫밥 주는 이가 없어도 눈치 보는 일을 자처했다. 내 의지가 소외된 삶을 꾸준히 이어갔다. 살면서 터지는 사건 사고에 엄마는 ‘죽지 못해 산다’가, 난 ‘내 팔자려니’가 추임새였다. 지나가는 개가 들으면 우리 집 가훈인 양.


내 나이 앞대가리에 ‘4’자가 붙으면서 ‘의지’가 내 몸을 잡아끌기 시작했다. 아무리 ‘4’자가 재수 없는 숫자기로서니 눈치로 무장한 역할들이 마흔 넘어 도미노 판을 벌였다. 딸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차장으로서 내두른 완장이 너덜너덜해졌다. 무너져 내린 몸과 마음을 일으키고자 헬스장에 첫 발을 내딛었다. 동네 산책도 거들떠보지 않던 몸이 헬스장에 3년 등교했다. 중학생 아들마냥 의무교육 3년 받듯이 그렇게.


어떻게 그리 운동을 꾸준히 할 수 있느냐, 혹시 중독 아니냐는 소릴 들었다. 외세에 쉽사리 공격당하는 뼈마디와 물러터진 근육 덕분에 습관으로 눌러 앉게 되었다. 직업군인처럼. 의무운동 3년 이수하니 얼떨결에 체형도 균형감을 찾았다. 적성과 평행선인 줄 알았던 직업도 계속 하다 보니 실력 접점이 생긴 것처럼.


그렇게 지내던 중 헬스장 안 쇼윈도가 포착되었다. 쇼윈도 밖에서 기구와 씨름하는 나와 달리 쇼윈도 안에서는 머리칼이 흔들거렸다(회사가 지방이라 주말에만 집근처 헬스장을 간다). 세련된 회원들을 거쳐 강사에게 시선이 멈춰 섰다. 작은 키에 어느 정도의 살집, 숏컷 파마머리 강사. 누가 봐도 강사로 보진 않을 듯한 외모, 헌데 몸짓이 내 마음을 강타했다. 하나의 몸짓이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오십을 바라보는 이제, ‘줌바댄스’라는 말을 배웠으니 ‘넌 어느 별에서 왔니’라는 독백이 절로 나온다.



헬스장 GX(단체운동) 룸은 텃새 서식지 같아 그동안 얼씬도 하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면  ‘언니, 언니’ 소리도 우르르 밀려나와 그 인파를 헤치고 들어갈 용기가 없었다. 3년간 그곳은 내겐 또 다른 행성이었다. 남성 손때 묻은 기구만 매만졌던 나. 뱃살 출렁이던 강사 모습이 일주일 내내 아른거렸다. 보고 싶은 마음에 열병 앓을라. 일주일 후 금요일. 퇴근하자마자 서울 올라가 헬스장 GX룸으로 향했다. 저녁 8시 50분. 10분 후면 줌바댄스 강사와 회원들이 등장하니 구석 자리 미리 확보.


줌바댄스는 음악이 시작을 알린다(특히나 마스크 낀 상태이니). 강사는 표정과 손짓으로 소통을 한다. 어느새 내가 선생님 바로 앞 가운데에 있다. ‘음악, 춤, 단체’로 똘똘 뭉친 밧줄이 날 그 자리까지 끌어다 놓았다. 다 같이 음악에 몸을 싣는 일은 나를 미칠 지경에 이르게 했다. 이 지경이 무아지경(無我之境)인가 보다. 일상에서 분리된 또 다른 ‘나’, 아니 일상에서 발견 못한 진정한 ‘나’를 만났다. 이러다 경지에 오르면 유아경지(有我境地)인 건가.


욕구를 쫓아내려고, 막연한 짝사랑을 버리려고 달려든 줌바댄스였다. 나도 모르는 나를 만나 오히려 불꽃 튀는 사랑에 빠졌다. 일주일이 기다려진다. 대전발 0시50분이 아닌 서울발 18시30분을 향해 금요일 업무도 뜀박질 한다. 하루는 사무실에서 직원이 내게 “팀장님 스트레스 받으시겠어요.”하는데 “괜찮아. 밤에 흔들면 돼”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음악, 단체, 움직임, 이 삼합메뉴에 내가 그렇게나 게걸스레 입맛 다실 줄은 몰랐다. 평소 하던 운동도 이젠 의무가 아닌 줌바댄스 예행연습으로 삼는다. 텃새고 참새고, 쫄고 자시고도 없이 강사 코앞에서 내 몸이 버드나무 이파리가 될 줄이야.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어느새 지정석이 되었다.


© dncerullo, 출처 Unsplash





켈리 맥고니걸의 <움직임의 힘> 책에서도 줌바댄스가 자주 등장한다. 줌바댄스가 우울증에 좋네 어쨌네 하길래 운동이 뭐 다 그렇지, 동작 안 나오면 그게 더 우울하겠구만, 하는 반응이었다. 헌데,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고 책말은 내가 듣는 꼴이다. 몸 흔들고 책과 연계하고 또 이렇게 글까지 쓰는 이 순간이야말로 온전히 ‘나’와 마주하고 나답게 한다(실제로도 가장 많은 칼로리 소모, 가장 빠른 독서, 가장 빨리 쓴 글이다).  


세상에는 내 의지와 관계없이 태어났지만 무덤까지 가는 길은 내 의지에 달렸다. 주도권은 내게 있다. 서브는 이제 마이턴! 내가 던진 공을 세상이 받을 차례다. 팔자타령 기질이 안정궤도에 완전히 진입하진 못했다. 자존감 항온동물로 살기 위해 나다운 곳의 발견은 지속할 것이다(줌바에서 쌈바로 가려나). 나를 나답게 만드는 시간, 공간, 관계로의 여행.  


‘어쩌다’ 마주친 그대. 그대 모습이 내 마음을 사로잡아버렸네. 줌바댄스 그대 듣고 있는가. ‘어쩌다’ 나에게 딱 걸렸으니 이를 어쩌나. 뭘 어째. ‘나’를 잃어버릴 정도로 ‘나’를 찾았으니 어찌어찌 밀어붙여야지. ‘나’만의 색깔로 우리 모두가 만난다면 알록달록 빛깔로 세상은 더 아름다울 것이다. 그 길, 혼자가기 외로워 이렇게 물귀신 작전을 펼친다. 이런 집요함도 나다운 모습이니 기꺼이 받아주길 바라며.


‘나’를 찾도록 만든 부모에게 눈물겹게 감사하다.


유독 이 노래가 생각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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