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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시퀸 이지 Sep 02. 2020

언택트와 컨택트, 집콕과 홈트 사이

- 코로나19와 줌바댄스, 숨통 트는 15분 -


한층 강화된 사회적 거리두기로 이번 주는 스포츠 센터와 학원도 문을 닫았다. 그나마 주말만 얼쩡댔던 헬스장과 폴댄스 학원. 이순신 장군이 그의 죽음을 적들에게 알리지 말라 했다면, 난 이동경로를 코로나19팀에 알리기 싫어 3주째 스포츠와 거리두기 중이다. 그 틈을 타 새로 시작한 홈트가 있다. 바로 줌바댄스(이하 ‘줌바’)다. 줌바는 금요일 밤 원주에서 올라와 헬스장 GX룸에서 간을 몇 번 보긴 했다. 이제 좀 눈을 뜬 줌바, 사회적 거리로 내몰려 유튜브 구독까지 왔다. 온라인 줌바를 한지 열흘을 넘어섰다.



운동 서적에서는 유산소 운동을 30분정도 매일하면 체중이나 근력 준비 차원에서 좋다고 한다. 그래서 줌바에게 그 임무를 부여했다. 하루 틈새시간과 지속성을 감안해 매일 15분으로 설정했다. 헌데 지키기가 매우 어렵다. 고작 15분만 달랑 하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막상 스텝 한번 밟으면 15분을 두 번은 갔다 올 기세다. 줌바 종류는 어찌나 많은지, 하루는 또 왜 이리 짧은지. 온라인 줌바는 해외 영상까지 가능하다(영어는 끽해야 up, down 정도 나온다). 세상은 넓고 할 줌바는 많다.



운동에 있어 난 환경빨, 장비빨 의존형 인간인 줄 알았다. 유튜브로 집에서 막상 해보니 그 나름의 맛이 또 있다. 줌바는 단체로 하는 게 묘미라 선생님 혼자 가르치는 유튜브는 아직까지 열어보진 않았다. 셀카봉에 휴대폰을 끼운다. 플레이를 누르는 순간 화면 속으로 기어들어가 그들 옆에서 하는 것 같다. 헬스장 GX에서도 처음 해보는 주제에 강사 코앞에서 하던, 자리만 모범생이었다. 휴대폰 화면 역시 그 맛 그대로다. 아니, 내 옆, 뒤로 아무도 없으니 더 물 만났다. 틀릴까봐 눈치 보던 게 사라지니 흥이 더 기고만장이다.



5분짜리 동영상을 3번 하던, 15분짜리 동영상을 한 번에 하던, 끝나면 몸은 땀을 뒤집어쓴다. 몸은 그동안 억누른 걸 터트릴 기세로 뜨겁다. 심장박동은 빨라지고 땀은 흥건한 이런 상태를 두고 운동가들은 몸 속에서 아드레날린이 난리 났다고들 한다. 이때 몸의 면역도 올라간다. 살면서 두려움과 불안을 만날 때에도 몸은 똑같이 반응한다. 심장 벌렁대고 식은땀 쏙 빠지고 얼굴 화끈거리는 모습. 줌바로 몸이 예습했으니 설령 두려운 상황을 만나더라도 마음은 이미 해본 일로 취급할 터. 운동 효과로 착각할 수 있겠다.



코로나바이러스로 물리적, 관계적 제한이 생겼다. 굳이 코로나바이러스가 아니더라도 내 삶에 가동범위를 넓힐 때도 됐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나의 가동범위는 좁아 터졌다. 새로움을 장착해 가동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죽는 순간까지 O, X 퀴즈를 푸는 게 삶이다. 새로운 세계, 미지의 영역에서 최종 우승자는 아니더라도 본선 진출한 것만으로도 생을 마감할 때 눈꺼풀이 편안하게 내려올 듯싶다(하루하루 매순간을 낯선 업무와 만나니 일상도 승부욕 나나보다).



이왕 환상의 나라, 줌바 월드에 발 들인 거 줌바가 도대체 뭔지 깊숙이 참견해야겠다. 그동안 강사 보고 시늉 좀 냈다만 줌바 아닌 ‘막춤’이었던 것 같다. 평일엔 원룸이 내어준 공간에서, 주말엔 TV, 컴퓨터에 여념 없는 가족들 틈바구니에서 줌바를 거행한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집콕 상황에서 대놓고 운동하니 ‘운동해야지’란 바이러스가 집안에 전파된다. 뚫어져라 쳐다보던 모니터 화면 너머 나를 흘끔흘끔 쳐다보는 걸 보니(뒤에서 동작 따라하는 엄마의 인기척 발견).  




참고로 엄마는 지압볼로 발바닥과 열심히 컨택트 중이다. 발바닥, 발목, 무릎, 골반, 허리, 심장, 어깨, 갑상선, 목, 눈... 중력을 거스르며 어디 하나 성한 데가 없어 ‘쓰러지기’와 ‘넘어지기’가 개인기인 엄마. 일어서서는 발바닥이 지압볼과 만날 때 참을 수 없는 불편감으로 앉아서 수시로 발바닥을 굴린다. 엄마는 발목 힘이 없어 지압볼이 발바닥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압볼 가둘 울타리를 만들어야 될 판. 굴러간 공을 주을지라도 언택트 상황에서 익숙함과의 결별이니 반가운 일이다.



아이는 드럼학원을 휴대폰으로 대신하고 있다. 화면에서 비트가 흘러나온다. 머리와 손발, 몸에서 까딱거릴 수 있는 부위는 죄다 흔들거린다. 어릴 적 내가 어른들 노랫가락에 젓가락을 휘둘렀듯이 아이 모습과 나의 추억이 컨택트 된다. 냄비뚜껑과 뒤집은 상자를 두드리던 그 때 그 시절. 이 글을 쓰는 동안 이웃집에서도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온다. 집콕으로 피아노와 만났나 보다.



언택트 상황으로 재택근무자가 많다보니 휴대폰 업무연락도 잦다. 그 바람에 휴대폰 문자 쓰기 빠르기도 레벨업 됐다. 비트가 알레그로쯤 되는 것 같다. 업무 관련 단톡(단체 카카오톡) 방들을 드나들면서 손가락도 요즘 댄스 중이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나름의 문자댄스다. 언택트는 또 다른 리듬을 만든다. 어찌보면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언택트’보단 내 삶의 ‘언택트’를 분별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 무엇을 ‘언택트’하고 무엇을 ‘컨택트’할지 그것이 문제로소이다. 이에 대한 실천이야말로 면역 높이는 길이다.



강제수용소 하면 떠오르는 인물,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빅토르 프랭클도 그랬다. “삶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만이 힘든 상황을 견뎌 낼 능력이 있다”고. 한때 개그콘서트 유행어였던,  ‘아, 의미 없다’란 말. 그 ‘의미’는 타자와의 컨택트 보단 나만의 정체성, 존재감에 달려 있다. 그 존재감은 ‘바디감’으로 면역이 끌어 오를 때 찬란해진다.  



올해 달력도 4장 남았다. 그 4장이 마지막 잎새 흔들리는 몸부림 같다. 남은 넉 달, 당신의 의미는? 그런 당신과 컨택트 하련다.          




* 글은 일요일에 쓰고, 줌바 영상은 좀 전에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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