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
- 그깟 -
다행입니다
밤 8시 너머까지 세상을
지배하던 해의 호흡이
짧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선택권을 뺏긴 이에게
해의 강요는 늘
일방적이었습니다
보고 싶지 않아도
봐야만 하는 일은
원죄의 굴레였습니다
그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강할수록
해는 더 짱짱했습니다
눈을 감는 것도
한순간 뿐이었습니다
이미 포기가 일상이
된 지 오래지만,
희망, 기대 따위를
버린 지는 더 오래지만
요망한 마음은
"그래도"를 외칩니다
소용없는 발버둥임을
알지만, 해를 향해 더
눈을 부릅뜹니다
그 순간 보았습니다
더 높아진 구름과
더 부드러워진 하늘을
그리고 들었습니다
여름 해를 송별하고 오는
바람의 서늘한 심장소리를
다행입니다
그깟이라는 주문 같은
말을 알게 되어서
그깟 세상 눈 때문에
그깟 사람 때문에
그깟 마음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엔 꼭 죽으라는 법만은
없는 모양입니다
이제 다시 나를 봅니다
이제 다시 세상을
정면으로 똑바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