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마음 구실

인류세 1

by 이주형

마음 구실

- 인류세 1 -


우리는 매일 마음이

짓는 계단에서 살았다


때론 오름 길로

때론 허리 길로

때론 내림 길로


계단의 첫 디딤판은

언제나 미안함이었다

너를 밟고 서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밟고 섰다


미안함은 우리로 사는

숨이었다, 그 숨으로

사람 구실하며 살았다


그 숨 안에서 우리는 너를

거울삼아 나를 보았다


부끄러움이 보일 때

욕심은 스스로를 지우고

계단참을 만들었다


그때는 배려도, 이해도

희생도, 헌신도 더 이상

외딴섬으로 존재하지 않고

모두 디딤판이 되었다


하지만 구실이 뜻을 잃으면서

우리는 내게 눈 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미안함이 사라지고

부끄러움도 멸종했다


마음은 더 이상 서로를 위한

계단을 짓지 못했다,

미안함을 잊은 사람들이

섬이 되어 성난 혜성처럼

떠다녔다


인류세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