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를4세의 로맨틱함을 엿볼 수 있는 곳.
그간 미뤄왔던 크르지보크라트에 가는 날이다. 저번에 기차 시간에 살짝 늦어 Konopiště(코노피슈테)로 노선을 변경했던 기억에 일찍 일어나 도시락도 싸고 기차시간에 맞춰 중앙역으로 갔다. 시간표도 정확히 확인하고 시간도 제대로 맞춰 11시44분에 들어온 열차를 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Beroun(베룬)역에서 갈아타야 하는데 기차 안내판에 환승역은 엉뚱한 smichov(스미호프)까지밖에 보이질 않았다.
분명히 타기 전에 직원한테 두 번을 확인했는데, 그 직원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맞다고 한건지... 살짝 짜증이 났지만 그래도 멀리 온게 아니라 일단 smichov에서 내려 체코 기차 어플을 확인했다. 다음 열차는 2시간뒤... 순간 '이 아무것도 없는 이 열차 역에서 기다려야 하나?', '일단 다시 돌아갈까?'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결국 여기서 두 시간을 기다리는 건 무의미 하단 생각이 들어 다시 프라하 중앙역으로 돌아왔다. 기다리는 시간동안 내가 왜 기차를 놓쳤는지 유심히 지켜보기 시작했다. 알고보니 한 플렛폼에 두 개의 열차가 정차할 때가 있었다. 즉, 전광판에는 a, b로 표시되어 a가 먼저 출발하고 b가 다음으로 출발하는 형식이다. 아까 나는 그걸 확인하지 못 한 채, 정말이지 열차의 한 칸 차이로 앞에 열차를 탔던 것이다.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확인하고 열차를 탔다. 독일까지 가는 기차라 그런지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한국에서라면 북적북적한 열차에 기운이 빠져 짜증났을 법도 하지만 여행중에 사람들이 많은 열차를 타면 '사람구경' 이라는 것 하나로도 즐거워 질 수가 있다.
주관적이긴 하지만 여행다니면서 여행객들을 관찰한 결과 유럽 국가에 따라 제각각의 특징이 있다. 예를 들면, 이탈리아 사람들이나 러시아 사람들은 대화소리가 크고 무례한 반면 영국 사람이나 독일 사람은 남에게 피해주지 않는 여행을 하는 편이다. (하지만 술을 마시면 다 똑같다. 소리지르고 시끄럽다.)
그렇게 사람 구경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환승역인 Beroun역에 도착했다. Beroun역은 환승해가는 조그마한 역으로 바로 옆에 Křivoklát 행 열차가 있어 바로 탔다. Kutná Hora갈 때와 마찬 가지로 작은 미니 열차였는데, 이런 열차를 탈 때면 마치 내가 적혈구가 되어 대동맥을 타고 여행하다 모세혈관으로 흘러드는 느낌이다. 보통 작은 열차들은 모세혈관처럼 구석구석 작은 마을들을 이어주는 교통으로 사람들도 많이 없고 여유가 많은 편이다.
여유를 즐기며 앉아있는데 미국인 가족이 옆에 앉았다. 꼬마아이 둘과 함께였는데, 우리가 어릴 때 많이 했던 스무고개 게임을 하고 있었다. Křivoklát라고는 전설밖에 몰랐던 터라 왜 가족이 Křivoklát에 가는지 궁금했던 나는 슬쩍 말을 걸어봤다. 아저씨는 아이들과 노느라 정신없을 텐데, 곧 잘 대답해 주었다. 이름은 John으로 뉴옥에서 프라하에 파견을 와 10년째 보다폰 마케팅 부서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오늘은 프라하 지사 입사 10년 주년 기념으로 휴가를 받아 가족들과 놀러가는 길이라고 했다. 10년 기념 휴가라니... 새삼 유럽의 회사 문화에 감탄을 했다. 우리나라라면 차장직함정도 달 시기에 주는 일주일 짜리휴가... 참 쉽지 않은 휴가다.
얘기 거리를 생각하던 중 학부 마케팅 수업 때 기업사례로 보다폰을 들었던 적이 있어 보다폰 마케팅에 대해 몇 가지 물어봤다. 역시 본인 분야의 얘기다보니 우리나라 아저씨들과 다름없이 끊이질 않는 이야기를 해줬다. 슬슬 전문용어가 나오고 내 마케팅에 대한 지식이 떨어져가자 나는 본격적으로 정보를 얻기 위해 Křivoklát에 왜 가는지 물어봤다.
Křivoklát는 체코에서 가장 오래된 성중 하나로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그 분위기가 좋아 John이 체코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 중 하나라고 했다. 특히 성 근처 강에서 수영과 바비큐를 즐길 수 있어 아이들과 휴가 오기에 최적의 장소라고 했다.
얘기가 길어지다 보니 아이들은 내게 아빠를 뺏겼다 싶었는지 입술이 뾰루퉁나왔다. 아이들 눈치 때문에 이야기는 그만 접어두고 아저씨는 다시 아이들과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대화가 길었는지 생각보다 빠르게 Křivoklát에 도착했다. John에게 더 많은 얘기를 듣고 싶었지만 가족과의 시간을 뺏기 싫어 그쯤에서 헤어졌다.
숲이 우거진 길을 따라 내려가자 작은 강이 보이고, 다리를 건너자 드디어 숲에 둘러쌓인 마을 입구에 다다랐다. Křivoklát도 여느 근교마을처럼 작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 어느곳도 이곳의 선선함과 선선한 바람이 주는 상쾌함을 따라갈 곳이 없었다. 거대한 숲에 둘러 쌓여 주는 자정감이 마치 나의 몸과 마음도 깨끗하게 치유해주는 기분이었다.
잠깐 이야기를 돌려 체코어를 읽는 법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인터넷에 보게 되면 체코어 지명에 있어서 틀리게 표기해 놓은 블로그들이 많다. 이는 체코어의 알파벳이 다른 영어의 알파벳 체계와 조금 다른 점에서 오는 차이점이다. Křivoklát도 마찬가지이다. 여기 까지 읽으면서 Křivoklát를 크리보크라트가 아닌 크르지보크라트라 썼는지 분명히 의아해 하시는 분이 있을 것이다. 체코어 전공자가 아니라 깊게 설명은 못하지만 체코어에는 'ř' 이처럼 글씨위에 v표시, 하첵(háček)이라 불리는 기호가 있다. 여기 Křivoklát 처럼 r위에 하첵이 있으면 대체로 'Rz'로 발음되게 된다. 그래서 크리보크라트가 아닌 크르지보크라트라 읽는다.
여행에 군것질 거리가 빠질 수 없어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들고는 이정표를 보며 성을 찾아 걸었다. 이정표를 따라 5분정도 걸어 올라가자 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언덕에 우뚝 솟은 높은 성인데, 마치 라푼젤이 갇혔던 성처럼 생겼다. 옛날 이야기에 따르면 까를왕 또한 라푼젤 처럼 이곳에 갇혀있었다.
아내을 위한 까를4세의 선물
미래의 보헤미안 왕이자 로마 황제가 된 까를4세는 John of Luxembourg(보헤미아 왕이자 룩셈부르크 가문의 요한)와 Eliška Přemyslovna(엘리자베스)의 아들이다. 요한은 미래의 왕이 될 아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그의 부인 Queen Blanche de Valois(블랑쉬)와 함께 크르지보크라트로 보내 통치하도록 했습니다.
까를4세는 쉴틈없이 일을 하며 버려지다 싶이 했던 성을 재건축하기 위해 주변 농경지를 정리하고 프라하 성에 필적할 만한 궁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까를4세의 통치력이 그의 아버지 요한 왕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앞선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까를4세가 업적을 쌓아 갈 때 쯤, 요한 왕이 크르지보크라트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그는 그가 어떤 것들을 이루었는지 그의 아버지에게 자신있게 드러낼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요한 왕의 신하들이 까를4세가 요한 왕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는 루머를 얘기하자 요한 왕은 분노하였고 결국 아버지에게 인정 받고 싶은 그의 바램은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분노가 극에 달한 요한 왕은 결국 까를4세와 그의 부인을 크르지보크라트에 가뒀습니다.
까를4세의 부인 블랑쉬는 원래 미적 감각과 예술적 소양이 깊어 문화생활에 항상 적극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크르지보크라트에 갇히게 되자 무료한 나날만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녀의 남편이 아버지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 알았기 때문에 아무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하루하루 무료한 삶을 지내던 블랑쉬는 성의 돌처럼 감정이 메말라가고 말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아내를 무척 사랑했던 까를4세는 당연히 그녀의 슬픔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행복을 바라던 여름 어느 날, 그는 창가에 앉아 숲에서 시간을 보내는 그의 아내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블랑쉬는 그녀의 하인들과 숲에서 새의 소리를 들으며 숲의 향기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까를4세는 문득 그녀에게 해줄 이벤트를 떠올렸습니다. 그는 즉시 그의 하인들을 불러 그들이 잡을 수 있는 최대한의 새(특히 나이팅게일)를 잡아오라고 명령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이팅게일이 한 방을 가득찰 정도로 모였고 새 지저귐은 노랫소리가 되어 크르지보크라트의 온 숲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사랑 가득한 선물을 받은 블랑쉬는 다시 기운을 차려 그가 왕이 될 때를 대비해 열심히 그를 보필했습니다. 후에 나이팅게일은 숲에 널리 퍼져 오랜 시간동안 숲에 노랫소리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현재에도 왕과 왕비가 자주 걷던 길은 Pathe of Nightingales(나이팅게일의 길)로 불리고 있습니다.
성은 육안으로 보기에는 체코에서 가장 존경받는 까를왕이 살았을 법하지 않게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는 그저 평범한 여타의 성들과 같았다. 성의 입구를 통과하자 뜰이 나타나고 작은 기념품 가게 몇 개와 성을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었다. 성의 내부는 가이드 투어로만 진행되고 사람 수도 어느 정도 모여야 시작한다고 한다. 나는 들어가기보다 이야기에 나오는 주변 숲을 보기 위해 마을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까를왕이 부인을 위해 나이팅게일 새를 온 숲에 풀었다는 이곳, 실제로 성 위에서 내려다보니 마을 주변 전체가 숲이었다. 숲이 울창해서 인지 가장 더운 7월말임에도 불구하고 선선한 공기와 한층 여유를 주는 바람이 내 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눈을 감자 어디선가 새 지저귐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실제 그 소리가 나이팅게일일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더운 여름 숲의 시원한 바람과 새소리를 듣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나무의자에서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가 지났는지 누군가 나를 깨웠다. 정신 차리고 보니 John이다. 자기 가족은 성 투어를 갔고 자기는 예전에 이미 봐서 쉴 곳을 찾다가 날 발견했단다. 나도 잠이 깬 참에 아까 물어보지 못했던 것들과 이러저러한 얘기를 나눴다. 그러다 가족 얘기가 나왔는데, 놀라운 사실을 들었다. 사실 John은 아기를 가질 수 없어 모두 입양한 아이들이라고 했다. 뜬금없이 나에게 이런 얘기를 하기에 이유를 물었더니 더 놀라운 이야기를 했다. 바로 아이 중 한명이 한국인이라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티비에서만 보던 터라 나와 정말 먼 일 일줄 알았는데, 현실에서 마주하니 순간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John이 참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John이 한국인 아이를 입양하게 된 이유는 이러하다. 몇 년 전 한국이 전세계 lte통신망의 기준이 되자 회사차원에서 기술협약을 위해 한국에 왔단다. 그러고 sk텔레콤에서 하는 사회활동에 참여했다가 고아원에 들르게 되었는데, 어떤 아이와 마주친 눈을 잊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일정이 끝나고 휴가를 내어 한국에서 그 아이에 대한 입양 절차를 마치고 왔다고 한다. 아이 이름은 Cris, 한국이름은 아쉽게도 존의 한국 발음을 알아듣기 어려워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문득 아까 크리스가 나를 빤히 쳐다보는 걸 느꼈다. 체코 애들이 동양인을 신기하게 생각해서 나를 빤히 쳐다보는 일이 종종 있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존의 얘기를 듣고 생각하지 무언가의 이끌림이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생각된다.
John은 나중에 아이가 판단할 나이가 되면 뿌리를 찾아주고 싶다고 했다. 내가 진짜 부모가 아닌걸 알면 충격 받지 않겠냐고 했지만 이는 내 기우였다. 그는 낳아준 부모도 부모지만 진짜 사랑을 주고 가족의 정을 준 사람이 진정한 부모이기 않겠냐고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모든 판단은 크리스에게 맡기기로 했다고 한다. 참 대단하다. 입양도 큰 결정이었을 텐데, 나중에 아이가 크고 난 후 입양에 대한 사실과 그에 대한 판단을 맡긴다니... 나로썬 그 큰 뜻을 감히 다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왜 나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 때쯤, John이 조심히 내 연락처를 물어봤다. 사실 이런 얘기를 처음 만난 사람에게 얘기하는 게 쉽지 않지만 아까 한국인이라기에 털어 놓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는 혹시 나중에 한국에 관련해서 일이 생기면 연락해도 되겠냐며 정중히 물어왔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나에게 이런 깊은 얘기 까지 한 John에게 애정이 생겨 흔쾌히 연락처를 주었다.
John과 헤어지고 난 후 생각이 많아진 머리를 식힐겸 천천히 성을 둘러보았다. Křivoklát 성은 다른 성들에 비해 화려하지도 특이하지도 않다. 그래서 관광객도 많이 없는 편이다. 하지만 이점이 이곳에 올 이유라고 생각된다. 높은 곳에서 탁트인 숲 전경을 보면 생각이 많던 머리도 정리가 되고 한결 마음이 가벼워 지는 기분이다. 나이팅게일이 지저귀는 이곳, 한 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는 Křivoklát의 높은 성에 앉아 새소리를 들으며 블랑쉬가 느꼈던 로맨틱한 분위기를 여유롭게 즐기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