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면 9
장소: 어느 한적한 마을의 넓은 마당, 남사당패 단원들 앞
시간: 상천의 나이 20대 중반, 늦은 봄
따스한 햇살 아래, 남사당패 단원들이 둥글게 모여 앉아 만수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만수의 얼굴에는 굳은 결의가 서려 있었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여러분에게 중요한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단원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만수를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엄숙했다.
"우리가 함께 전국을 떠돌며 공연한 지도 어언 수십 년이 흘렀습니다. 저도 이제 나이가 들어 예전처럼 활발하게 움직이기가 어렵습니다."
단원들 사이에서 작은 술렁임이 일었다. 만수의 나이를 실감하며 그의 뒤를 누가 이을지에 대한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만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오랜 고민 끝에, 저의 뒤를 이어 이 남사당패를 이끌어갈 새로운 꼭두쇠를 정했습니다."
모든 시선이 만수에게 집중되었다. 단원들의 얼굴에는 기대와 궁금증, 그리고 약간의 긴장감이 뒤섞여 있었다.
만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시선은 굳건하게 한 사람을 향했다.
"나의 후계자는... 바로 상천이입니다!"
만수의 말이 끝나자, 장내는 잠시 정적에 휩싸였다. 예상했던 이도 있었겠지만,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상천은 예상치 못한 지명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만수를 바라보았다. "꼭두쇠님, 저... 제가 감히..."
만수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상천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 네 실력과 인품, 그리고 남사당패에 대한 뜨거운 마음을 내가 오랫동안 지켜봐 왔다. 너라면 우리 패를 훌륭하게 이끌어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단원들 사이에서는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부분 상천의 실력을 인정하고 그의 리더십을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 박수 소리 속에서, 유독 굳은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는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지석이었다. 그는 주먹을 꽉 쥔 채 상천을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격렬한 질투심과 함께 깊은 배신감이 들끓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더 오랫동안 남사당패에 헌신했고,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수의 결정은 그에게 큰 충격이자 상처였다.
상천은 지석의 굳은 표정을 감지했지만, 애써 외면하며 만수에게 다시 고개를 숙였다. "꼭두쇠님의 믿음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만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상천이가 우리 패를 잘 이끌어갈 수 있도록 모두 힘을 보태주시오."
그날 이후로 상천은 만수의 뒤를 이어 남사당패의 실질적인 리더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어깨에는 새로운 책임감과 함께, 지석의 차가운 시선이라는 또 다른 무게가 얹혀지게 되었다.
# 장면 10
장소: 어느 읍내 장터, 남사당패 공연 준비 현장
시간: 상천이 꼭두쇠가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낮
장터 한쪽, 남사당패의 공연 준비가 한창이었다. 상천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단원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공연 순서를 점검하고, 악기 상태를 확인하며, 무대 설치를 꼼꼼하게 챙겼다. 그의 얼굴에는 젊은 리더로서의 열정과 책임감이 가득했다.
하지만 곳곳에서 작은 마찰음들이 들려왔다. 특히 지석은 상천의 지시에 사사건건 반박하거나 불만을 토로했다.
"상천아, 오늘은 어름사니 순서를 조금 뒤로 미루는 게 좋을 것 같다. 장이 파하는 시간과 맞추는 게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있어." 상천이 자신의 의견을 제시했다.
지석은 냉소적인 표정으로 대꾸했다. "흥, 꼭두쇠 되더니 이제 네 맘대로 다 하겠다는 거냐? 원래 하던 순서가 있는데 왜 갑자기 바꾸려고 해?"
"그냥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보자는 거야. 그리고 이건 내 결정이기도 하고." 상천은 차분하게 답했지만, 지석의 반항적인 태도에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네 결정? 우리가 언제부터 그렇게 개인적인 결정에 따라 움직였냐? 만수 형님은 항상 단원들 의견을 먼저 물어봤어." 지석은 은근히 만수와 상천을 비교하며 상천의 리더십을 깎아내렸다.
주변의 다른 단원들은 두 사람의 날 선 대화에 어색한 침묵을 지켰다. 상천이 새로운 꼭두쇠가 된 것에 대해 일부 단원들은 아직 어색해했고, 지석의 불만스러운 태도에 동조하는 이들도 있었다.
상천은 한숨을 쉬며 지석을 바라보았다. "지석아, 나는 우리 패거리가 더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야. 네 의견도 존중하지만, 때로는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해."
"새로운 시도? 네가 뭘 안다고 함부로 새로운 시도를 하겠다는 거야? 경험도 없는 놈이..." 지석은 감정을 숨기지 않고 독설을 내뱉었다.
결국 두 사람의 언쟁은 점점 격화되었고, 주변 단원들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움이 감돌았다. 상천은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지석아, 이제 그만해. 나는 이 패의 꼭두쇠고, 내 결정에 따라야 해. 불만이 있다면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자." 상천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그의 눈빛은 강렬했다.
지석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거렸지만, 더 이상 대놓고 반항하지는 못했다. 그는 험악한 표정으로 돌아서서 자신의 악기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공연 준비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계속되었다. 상천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남은 일들을 처리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지석과의 갈등으로 인한 불편함이 남아 있었다. 그는 앞으로 꼭두쇠로서 이끌어가야 할 남사당패에 닥칠 어려움을 예감하는 듯했다. 젊은 리더의 앞날은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는 서서히 깨닫고 있었다.
# 장면 11
장소: 어느 마을의 좁은 골목길, 남사당패 이동 중
시간: 상천이 꼭두쇠가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저녁
며칠 후, 남사당패는 다음 공연 장소로 이동하던 중이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걷던 단원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꼭두쇠, 이 길이 맞소? 너무 돌아가는 것 같소." 한 베테랑 단원이 투덜거렸다.
다른 단원들도 수군거렸다. 상천이 이끄는 대로 왔지만, 길이 험하고 예상보다 오래 걸리자 불신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초행길인데다 밤까지 어두워져 길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지석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은근히 상천을 비꼬았다. "그러게 내가 원래 가던 대로 가자고 했잖아. 경험도 없는 애 말을 들으니 고생만 하는 거지."
상천은 묵묵히 앞서 걸으며 지도를 확인했다. 그는 나름대로 최단 거리를 택했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 때문에 길이 꼬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원들의 불만이 점점 커져가는 것을 느낀 상천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단원들을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난처함과 함께 결연함이 서려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길을 잘못 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금만 더 가면 큰길이 나올 겁니다." 상천은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하며 단원들을 안심시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지석은 냉소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조금만 더 가면? 얼마나 더 가야 하는데? 이러다 오늘 밤은 길바닥에서 ночевать하게 생겼어."
다른 단원들 역시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짐을 많이 든 어린 단원들은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상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계속 길을 헤매다가는 정말 큰 낭패를 볼 수도 있었다. 그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모두 잠시 멈추십시오!" 상천의 단호한 목소리에 단원들은 하던 행동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 없습니다. 지석이 형, 죄송하지만 잠시만 앞장서 주시겠습니까? 이 길은 형이 더 잘 아실 테니..." 상천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지석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지석은 예상치 못한 상천의 제안에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어차피 내가 아니면 이 고생을 끝낼 사람이 없지."
지석이 앞장서자 단원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과연 지석은 익숙한 길을 따라 막힘없이 나아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큰길에 다다를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길을 제대로 찾지 못했던 상천의 실수는 분명 아쉬웠지만,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솔직하게 도움을 요청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상천의 리더십에 대한 일부 단원들의 불안감을 증폭시켰고, 지석에게는 상천의 약점을 확인하고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앞으로 상천이 꼭두쇠로서 넘어야 할 산은 더욱 많아 보였다.
# 장면 12
장소: 활기 넘치는 어느 읍내 장터, 남사당패 공연 준비 현장
시간: 다음 날 아침
새로운 읍내 장터에 도착한 남사당패는 활기 넘치는 분위기에 잠시 들떴다. 장날이라 그런지 새벽부터 사람들로 북적였고, 여기저기서 흥정하는 소리와 맛있는 음식 냄새가 풍겨왔다. 상천은 좋은 공연 자리를 물색하기 위해 장터를 둘러보았다.
예전 같았으면 남사당패가 도착하면 자연스럽게 좋은 자리를 내어주거나, 먼저 공연을 요청하는 상인들이 많았지만, 시대는 변하고 있었다. 장터 한복판에는 이미 화려한 천막이 쳐져 있었고, 그 앞에서 호랑이 그림과 코끼리 사진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서커스단이었다.
상천의 얼굴에는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최근 몇 년 사이, 장터마다 서커스단이 들어서면서 남사당패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볼거리에 더 큰 관심을 보였고, 전통적인 남사당패 공연은 점차 외면받는 추세였다.
좋은 자리를 찾기 위해 애썼지만, 이미 서커스단이 최고의 명당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남은 곳은 구석진 외진 곳뿐이었다. 상천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지석에게 다가갔다.
"형님, 자리가 마땅치 않습니다. 서커스단이 좋은 곳을 다 차지해서..."
지석은 예상했다는 듯 냉담하게 말했다. "흥, 이제 우리 시대는 끝났다는 거겠지. 촌스러운 남사당패 공연을 누가 보겠어? 저 화려한 서커스에 다들 눈이 멀었을 텐데."
상천은 지석의 비관적인 말에 반박하고 싶었지만, 현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실제로 장터 사람들의 시선은 남사당패보다는 서커스단 쪽으로 더 많이 향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상천은 장터 구석진 한 곳에 자리를 잡고 공연 준비를 시작했다. 단원들의 표정은 помітно 어두웠다. 사람들의 관심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그들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연이 시작되었지만, 예상대로 관객은 많지 않았다. 웅장한 서커스 음악 소리에 묻혀 남사당패의 흥겨운 가락은 제대로 울려 퍼지지 못했다. 상천은 애써 활기찬 표정으로 꽹과리를 두드렸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깊은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공연 중간, 서커스단에서는 화려한 불 쇼가 펼쳐졌다. 입에서 불을 뿜는 곡예사의 모습에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순식간에 남사당패 공연장은 텅 비어버렸다. 상천과 단원들은 맥이 빠진 채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날 저녁, 남사당패 막사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예전 같았으면 공연의 성공을 자축하며 웃음꽃을 피웠겠지만, 오늘은 아무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상천은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단원들을 둘러보았다. 그는 꼭두쇠로서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고민에 잠겼다.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남사당패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 장면 13
장소: 읍내 장터, 밤
시간: 서커스단 공연이 끝난 후
텅 빈 공연장을 씁쓸하게 바라보던 상천은 밤이 되자 홀로 장터 어귀를 서성였다. 화려한 조명 아래 여전히 흥겨운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는 서커스단 천막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복잡하게 흔들렸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상천은 주먹을 꽉 쥐었다. 남사당패의 전통을 지키고 싶었지만, 현실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더 자극적이고 화려한 볼거리를 원했고, 전통 공연은 점차 외면받는 상황이었다.
결국 상천은 결심했다. 서커스단에 직접 가서 이야기를 해봐야겠다고. 무작정 싸움을 걸 생각은 없었지만, 적어도 그들이 공연하는 방식이나 호객 행위 때문에 남사당패가 피해를 보는 상황에 대해서는 항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상천은 용기를 내어 서커스단 천막 앞으로 향했다. 웅장한 천막의 크기와 화려한 그림들은 확실히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천막 안에서는 동물들의 울음소리와 곡예 연습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조심스럽게 천막 입구로 다가가자, 험악한 인상의 남자들이 경계하며 상천을 쳐다봤다.
"무슨 일이시오?" 한 남자가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저는 이 마을에서 공연하는 남사당패의 꼭두쇠입니다. 혹시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상천은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남자는 상천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비웃으며 말했다. "남사당패? 낡은 풍물이나 치는 사람들이 무슨 볼일로 우리 서커스단까지 찾아왔소?"
"저희 공연 때문에 손님들이 줄어드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희도 오랫동안 이 장터에서 공연을 해왔고, 생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혹시 서로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상천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려 했다.
하지만 남자는 상천의 말을 끊으며 냉정하게 말했다. "흥, 실력도 없는 것들이 괜히 남의 밥그릇 뺏으려고 수작 부리는 거 아니오? 당신들 같은 낡은 공연은 이제 아무도 안 봐. 시대가 변했다는 걸 왜 모르시오?"
모욕적인 말에 상천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우리의 공연도 나름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도 오랫동안 이 지역 사람들과 함께 해왔습니다. 당신들 때문에 저희가 공연을 못 하게 된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상천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
남자는 섬뜩한 눈빛으로 상천을 노려보며 말했다. "어쭈, 제법 깡도 있네? 하지만 당신들 힘으로는 우리한테 상대도 안 돼. 괜히 덤볐다가 다치지 말고 조용히 사라지시오!"
결국 상천은 서커스단과의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의 태도는 완강했고, 남사당패를 얕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분한 마음을 억누르며 상천은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깊은 분노와 함께, 남사당패를 지켜야겠다는 강한 의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이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결심은 앞으로 더욱 큰 갈등과 사건으로 이어질 것이었다.
# 장면 14
장소: 남사당패 막사 안, 저녁
시간: 상천이 서커스단을 다녀온 후
어두컴컴한 막사 안, 남사당패 단원들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상천은 낮에 서커스단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오늘 서커스단에 가서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단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상천에게 쏠렸다. 그들의 얼굴에는 걱정과 불안감이 역력했다.
상천은 낮에 서커스단 남자들과 나눴던 대화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들의 냉담하고 모욕적인 태도, 그리고 남사당패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발언들을 전하자, 막사 안의 분위기는 더욱 무거워졌다.
"저런 못된 놈들이 감히 우리 남사당패를..." 한 혈기왕성한 젊은 단원이 주먹을 쥐며 분통을 터뜨렸다.
다른 단원들도 울분을 참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오랫동안 이어져 온 전통과 자부심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석은 냉소적인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뭘 그렇게 흥분해? 어차피 현실이 그런 걸. 우리 같은 낡은 것들은 이제 설 자리가 없는 거야."
"형님, 너무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그래도 우리가 그냥 물러설 수는 없잖아요." 상천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석에게 말했다.
"그럼 뭘 어떻게 할 건데? 저렇게 힘센 놈들한테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 괜히 덤볐다가 다치기나 하지." 지석은 여전히 비관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그때, 묵묵히 상천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만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이 역력했다.
"서커스단 놈들이 우리를 얕잡아보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 하지만 이번에는 정도가 지나친 것 같군." 만수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는 단호함이 느껴졌다.
"꼭두쇠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단원들의 시선이 다시 만수에게 집중되었다.
만수는 잠시 침묵하더니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일 아침, 서커스단에 다시 한번 가보겠다. 그냥 물러설 수는 없지. 우리의 자존심을 걸고 한번 부딪혀 봐야 할 때가 온 것 같군."
만수의 말에 단원들의 얼굴에는 비장함이 감돌았다. 그들은 오랜 세월 남사당패를 이끌어온 만수의 결정을 믿고 따르기로 했다.
상천 역시 만수의 말에 힘을 얻었다. 혼자서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했지만, 만수와 동료들이 함께한다면 어떤 어려움도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생겼다.
그날 밤, 남사당패 막사 안에는 이전과는 다른 굳건한 결의가 감돌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다가올 서커스단과의 대결을 준비하고 있었다.
# 장면 15
장소: 읍내 장터, 서커스단 천막 앞
시간: 다음 날 아침
날이 밝자 만수를 필두로 남사당패 단원들이 서커스단 천막 앞에 모여들었다. 비장한 표정의 만수 뒤로 상천과 지석을 비롯한 단원들이 굳건한 모습으로 따랐다. 그들의 손에는 북채, 꽹과리 채 등 자신들을 보호할 만한 도구들이 들려 있었다.
서커스단 천막 앞에는 어제 상천과 실랑이를 벌였던 험악한 인상의 남자들이 여전히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만수가 다가가자 그들은 더욱 험악한 표정으로 맞섰다.
"어이, 늙은이. 또 무슨 볼일이냐?" 어제 상천에게 막말을 했던 남자가 거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만수는 그의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는 어제 당신들의 무례한 행동에 대해 항의하러 왔다. 우리 남사당패는 오랫동안 이 지역 사람들과 함께 해온 전통 있는 공연단이다. 함부로 우리를 무시하지 마라."
"흥, 전통? 웃기지도 않는 소리. 당신들 같은 낡은 것들은 이제 사라져야 할 때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겠어?" 남자는 더욱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다.
만수의 얼굴에는 분노가 서렸지만, 그는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우리는 당신들과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다. 다만 서로 존중하며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을 뿐이다."
"공존? 우리가 왜 당신들 같은 하찮은 존재들과 공존해야 하는데? 당신들은 그냥 이 장터에서 꺼져 주는 게 우리를 돕는 길이야!" 남자는 침을 뱉으며 소리쳤다.
더 이상 대화가 통하지 않음을 깨달은 만수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좋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겠다!"
만수의 외침과 동시에 남사당패 단원들은 들고 있던 채를 땅에 내리치며 함성을 질렀다. 그들의 기세에 서커스단 남자들도 움찔하며 경계 태세를 더욱 강화했다.
순식간에 양측의 분위기는 험악해졌고,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먼저 달려든 것은 혈기왕성한 젊은 단원들이었다. 그들은 주먹과 발을 휘두르며 서커스단 남자들에게 달려들었고, 곧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상천과 지석 역시 싸움에 뛰어들었다. 상천은 꽹과리 채를 휘두르며 자신을 방어했고, 지석은 날렵한 몸놀림으로 서커스단 남자들을 공격했다. 순식간에 장터는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여기저기서 비명과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싸움은 점점 더 격렬해졌고, 양측 모두 부상자들이 속출했다. 만수 역시 격렬한 몸싸움에 휘말려 심하게 다쳤다. 그때, 흥분한 서커스단 단원 중 한 명이 실수로 천막에 불을 붙였다. 순식간에 불길은 거세게 타올랐고, 천막 안에서 동물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길은 삽시간에 천막 전체로 번져나갔고, 연기와 재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서커스단 천막 안에서 놀라 뛰쳐나온 호랑이와 뱀들이 장터 곳곳으로 흩어지며 더욱 큰 혼란이 벌어졌다.
결국 경찰이 출동하고 나서야 싸움은 겨우 멈춰 섰다. 만수는 심한 부상을 입은 채 경찰에 연행되었고, 서커스단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남사당패는 더 이상 공연을 이어갈 수 없었고, 단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날의 끔찍한 사건은 상천에게 깊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 장면 16
장소: 항구 도시의 허름한 노동자 숙소, 밤
시간: 3년 후
낡은 창문 틈으로 차가운 바닷바람이 스며드는 방 안, 상천은 굳은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친 손은 며칠 동안 이어진 항만 노동으로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였다. 남루한 옷차림은 그의 고된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했다.
3년 전, 그 끔찍했던 서커스단과의 충돌 이후 남사당패는 완전히 해산했다. 만수는 감옥에 갇혔고, 동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상천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항구 도시를 떠돌며 온갖 궂은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의 젊은 날의 꿈과 열정은 거친 노동과 고독한 밤 속에서 희미하게 바래져 갔다.
그는 과거를 숨긴 채 묵묵히 일했다. 남사당패 출신이라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꽹과리를 치던 그의 화려했던 과거는 이제 그저 가슴 깊이 묻어둔 아픈 기억일 뿐이었다. 밤이 되면 그는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만수를 그리워했다. 가끔씩 번 돈을 모아 몰래 편지와 함께 영치금을 보냈다. '아버지, 곧 나오실 거죠? 그때까지 제가 아버지 몫까지 열심히 살겠습니다.' 그는 감옥에 있을 만수를 향해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어느 날, 항구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던 상천은 우연히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일본에서 왔다는 예쁜 여자가 사람들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멀리서도 한눈에 미숙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가슴이 격렬하게 뛰었지만, 상천은 황급히 몸을 숨겼다. 초라한 자신의 모습으로는 차마 그녀 앞에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미숙이 애타게 그를 찾아 헤매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가슴을 움켜쥐고 몰래 눈물을 흘렸다. '미숙아, 정말 보고 싶지만... 지금은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