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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주 Sep 18. 2024

4.고장난 피아노

조현병의 사전적 정의는 망상, 환청, 와해된 행동, 정서적 둔마 등의 증상이 주로 나타나고 사회적 기능에 장애를 일으키는 질환으로 설명된다.

원래는 정신분열병이라는 병명이었으나, 이 단어가 사회적인 이질감과 거부감을 불러 일으킨다는 이유로 편견을 없애기 위해 조현병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조현'이란, 사전적인 의미로 '현악기의 줄을 고르다' 즉 '현을 조율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마치 조현병 환자의 모습이 현악기가 정상적으로 조율되지 못했을 때처럼 혼란스러운 상태를 보이는 것 같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나는 이 부분이 꽤나 낭만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질환을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악기의 상태에 빗대어 명명하다니..

의학을 연구하시는 박사님들에게 '정신분열'을 '조현'이라고 바꾸어 불러주실만한 배려와 여유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감사했다.


나의 엄마는 40여년 전부터, 바로 이 조현병에 걸린 환자로 살고 있다.

내가 태어나고 돌이 되었을 무렵, 엄마는 이미 일상생활에 상당히 지장을 받을 정도로 조현병 증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혼자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고,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이 되지 않고, 어린 나를 케어하는 일은 더더욱 맡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피아노 학원을 유지할 수도 없게 되었다.

더이상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엄마가 나를 키울 수 없게 되자, 나는 강원도에 계신 할머니 손에 맡겨졌고, 아빠는 엄마와 함께 쌍문동을 떠났다.

그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많던 돈은 다 어디로 갔는지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아마 아빠는 피아노 학원을 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런저런 사업을 시도하다가 잘 되지 않았을테고 우리는 월계동의 작은 연립 반지하방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내가 정확히 기억하는 내 어린시절은 여기서부터다.

수 차례 서울과 강원도를 오가며 맡겨졌던 나는 6살 무렵에 월계동 집에서 엄마 아빠와 함께 살게 되었고, 나는 그때부터 내가 경험했던 엄마의 조현병 증상들을 또렷이 기억한다.


엄마의 주된 증상은 환청이었다.

엄마 귀에만 들리는 이상한 소리들이 존재했다.

후에 의사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조현병 환자에게 환청은 꼭 부정적인 말들을 누군가가 소리치는 형태로 또렷이 들린다는 것이다

"넌 패배자야! 넌 할 수 없어! 사람들은 다 널 미워해!"

엄마는 귀를 틀어막고 소리쳤다.

"나한테 왜 그래요! 나 아니에요!"

그리고 끊임없이 머리 속의 그 사람들과 대화를 시도했다

화를 내고 소리치고 싸웠다.

누워서 데굴데굴 구르며 귀를 틀어막고 소리질렀다.

환청은 망상으로 이어졌다.

"아무개가 우리집을 감시하고 있다. 지금도 우리 집을 엿보고 갔다. 너도 조심해라"

이해되지 않는 엄마 말을 들으며 내 나름대로 엄마를 설득해 보려고도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목소리와 욕지거리였다.

"아빠와 내 사이를 니가 이간질시키고 있어!"

엄마는 나를 미워했고, 때렸고, 욕하고 밖으로 내 쫓아 버렸다.


이런 커다란 증상들이 없는 날에도 엄마는 기본적으로 내게 '그냥 아픈 사람'이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건지 정확히 말할 순 없지만, 엄마는 늘 아팠다.

머리가 아팠고, 소화가 잘 안되었고, 눈이 뻑뻑해서 잘 보이질 않았고, 어지러웠다.

머리가 아프면 두통약, 소화가 안되면 소화제, 엄마는 약국에서 파는 약에 극도로 집착했다.

자신의 몸이 불편하고 뚜렷한 해결책은 보이지 않으니 약국에서 무분별하게 약을 사다 먹은 것이다.


이제와서 생각했을 때, 왜 그때부터 본격적인 치료에 들어가지 않았을까 의문스러울 수 있지만, 그때 당시에는 신경정신과가 지금처럼 동네에 흔하게 있지도 않았고, 엄마같은 사람의 병명이 무엇인지, 어떻게 치료를 해야 하는 것인지 병원에서도 정확하게 알려주지 못했다.

그래서 엄마는 약국에서 사다 먹을 수 있는 모든 약에 더 집착했던게 아닌가 싶다.


엄마는 이랬다 저랬다, 좀처럼 종 잡을 수 없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도, 이내 잠잠해지더니 밥을 차려주고, 어떤 날은 나에게 한글을 가르쳐주고, 다시 누워있다가, 나를 미용실에 데려가서 파마를 시켜주기도 했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월계동 시절의 엄마는, 소용돌이 치는 자신의 내면을 어느정도 컨트롤 하면서, 엄마로서 아내로서, 자신이 해야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을 해낼 만한 정신과 에너지가 남아있었다.

아빠는 그런 엄마와 나를 집에 두고 돈을 벌기 위해 억지로 밖으로 나가야 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엄마와 단 둘이 있는 시간이 불안했고, 아빠가 돌아올 시간만을 간절히 기다렸다.

당시 택시 운전을 하던 아빠가 가끔씩 사들고 왔던 노란 봉투에 담긴 통닭의 냄새가 아직도 코끝에 남아있다.


월계동에서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동네 친구 엄마가 국민학교 입학 하던 날, 엄마와 내 사진을 찍어주었는데, 볼 때마다 한숨이 새어나온다.

엄마의 정신이 피폐해진 만큼, 엄마의 몸도 이미 많이 망가져 있었다.

빼빼마른 몸을 하고는, 눈에 띄는 새빨간 스타킹을 신고, 이해할 수 없는 헤어스타일에, 다 밀고는 싸인펜으로 진하게 그려놓은 인위적인 눈썹을 한 엄마 옆에, 인생이 불행한 여덟살 짜리 여자애가 서 있는 사진이다.


그렇게 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서 혼자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욕을 하는 등 갈수록 심해지는 엄마의 증상에, 아빠는 이대로 서울에 우리끼리 살 수 없겠다는 판단을 내리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시는 강원도로 내려갔다.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던 고향으로, 아빠는 인생의 험한 무게를 짊어지고 다시 내려갔다.


그리고 이 무렵, 엄마의 친정, 나의 외가집 식구들은 엄마를 포기했다.

엄마라는 삶의 무게는 오롯이 아빠와 나의 것이 되었다.


강원도 할머니 품으로 내려간 우리는 서울에 외로이 있을 때보다 조금은 안정되었다.

아마도 의지할 가족들이 있으니 그 증상이 조금 완화되었고, 아빠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시니 안심하고 밖에 나가 일할 수 있었다.

엄마는 봄이 되면 바구니를 들고 쑥을 캐러 나갔다

시골의 봄은 한창 논밭일을 시작해야 할 바쁜 시기인데, 엄마는 아랑곳이 없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밭에서 일을 하다가 "진주 엄마~ 일 안하고 어디가?" 물으면

엄마는 수줍은 웃음을 웃으며 "쑥 캐러요~" 대답을 하고는 열심히 쑥을 캐다가 나 먹으라고 쑥떡을 만들어줬다.

지금은 레시피도 생각나지 않는 전자레인지 계란빵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내 생일 파티를 집에서 성대하게 치뤄주었다.

친구들을 모두 초대해 케잌과 맛있는 음식들을 가득 차려놓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산에서 들에서 친구들과 신나게 놀았다.

가끔 엄마가 이상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할아버지 할머니의 보호가 있었고, 엄마의 증상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현병 환자에게 안정적인 환경이 이래서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엄마는 좁디좁은 서울 반지하 연립에 살 때보다, 건강한 자연환경에서 의지할 수 있는 가족들과 모여 살 때 증상에 크게 호전을 보였고, 스스로 편안함을 느꼈다.


내가 4학년이 되었을 때, 아빠는 엄마의 증상이 조금 완화되어 보이는 것에 힘을 얻어,

더 나은 벌이와, 엄마 치료를 위한 병원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경기도 광명시로 이주를 결심했다.

광명으로 이사 온 우리는 어느 교회 안의 교육관에 터전을 잡았다.

아빠가 교회 사찰 집사 일을 얻은 것이다.

집을 따로 얻을 돈은 없어, 교회에서 제공한 방에서 삶을 해결해야 했고, 처음 몇 달은 1층 교육관, 그 다음엔 꼭대기 옥탑방에서 살았다.

낯선 곳에서, 그것도 너무나도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해야 했던 탓이었는지, 엄마의 증상은 극도로 심각해졌다.


엄마는 더이상 나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지도 않았고, 집안일을 감당하지도 못했다.

자신의 몸도 챙길 수 없었던 엄마의 치아는 썩어들어갔고, 몸은 더욱 말라만 갔다.

아빠는 바빴고, 나는 하루 한끼 컵라면으로 식사를 떼워야 하는 날도 있었다.


하루는 엄마가 숨을 못 쉬겠다고 발작을 일으켜 가까운 대학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다.

엄마는 응급실이 떠나가라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주변 환자들은 좀 조용히 하라며 불평을 하였다.

나는 파르르 떨리는 엄마의 손을 꽉 잡고 서 있었고, 아빠는 연신 죄송하다고 주변에 사과하며 의사의 지시를 기다렸다.


내 기억에 그때부터 병원에서 신경정신과적 치료를 받을 것을 권했으나, 엄마가 자신의 병을 인정하지 않고 치료를 거부했다.

조현병을 앓고 있는 대부분의 환자들이 보이는 공통적인 모습이라고 한다.

조현병 환자들에게는 자신의 병을 인정하는 것, 그래서 의료적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하기까지의 시간이 오래 걸리고, 설령 치료를 시작하더라도, 약의 부작용이 싫어 약을 몇 번 복용하다가 스스로 치료를 중단해버리는 사례가 많다.


엄마는 치료가 시급한 환자였다.

치료를 받지 않는 엄마를 감당해야 하는 아빠와 나의 고통은 너무 극심했다.

아빠의 기억에 따르면 그때 당시 가까운 신경정신과 병원이 있어 몇 번 약을 타다 먹어보기도 했지만, 엄마가 스스로 중단했다고 한다.

약. 약만 먹으면 해결되는 일이었다.


아빠는 열악한 교회 환경을 떠나 옆 동네로 이사했고, 그 곳에서도 엄마는 하루가 멀다하고 집안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일쑤였다.

마음씨 좋은 주인집 할머니가 내려오셔서 "진주엄마 왜그래~ 진주엄마 진정해~" 달래주시기만 하셨고, 우리를 쫓아내지는 않으셨다.


엄마는 환청을 피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면봉으로 귓구멍을 피가 나도록 파기도 했고, 휴지를 동그랗게 뭉쳐 귀를 막았다.

스카프로 머리를 싸매고 귀를 틀어막고 누워있었고, 두통약, 변비약, 소화제, 자양강장제, 감기약 등 약국에서 파는 약에 더없이 집착했다.


아빠와 나는, 이제는 고정값이 되어버린 이 일상의 고통에 익숙해지며 지리한 시간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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