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계동에 살던 7살 1년, 유치원에 다녔다.
"꽃밭에는 꽃들이~ 모여 살고요~" 노래를 따라 부르던 기억이 난다.
유치원에서 드림랜드로 소풍을 갔는데, 친구들과 함께 탄 어떤 놀이기구 하나가 무척 재밌었다.
공중에 붕~ 떠오르는 놀이기구였는데, 아빠에게 한 번만 더 그 놀이기구가 타고 싶다고 얘기를 해서, 아빠 시간이 되는 어느 날, 아빠와 함께 드림랜드에 갔다.
소풍날과는 다르게 흐리고, 가끔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다시 그 놀이기구를 타는데, 친구들도 없이 나 혼자, 빗방울을 맞으며 다시 타는 그 놀이기구가 하나도 재미가 없고, 마음에 쓸쓸함이 밀려왔다.
놀이기구 바깥에서 손을 흔드는 아빠를 바라보았지만, 웃음이 나질 않았다.
40이 넘은 지금도 가끔 그때 그날의 장면과 감정이 떠오른다.
그토록 재밌었던 놀이기구를 다시 탔는데 나는 왜 하나도 신이 나질 않았을까
우울한 하늘이, 예기치 않게 내리는 빗줄기가, 홀로 외롭게 서있는 아빠가, 나는 참 우울하고 슬프게 느껴졌다.
7살, 나는 그런 감정들을 배워가기 시작했다.
강원도에 내려가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게 되었을 무렵, 나는 자다가 크게 놀라며 깨어 엉엉 우는 일이 잦아졌다.
어른들은 무서운 꿈을 꾸었냐, 괴물을 본 것이냐 물어보셨지만, 어린 나로서는 내가 자다가 놀라는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이렇게 자다가 놀라 깨는 증상은 성인이 된 후 까지도 이어졌는데, 기억나는 느낌이 하나 있다.
어릴 때 자다 놀라던 그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동일하게, 나는 꿈속에서 아득하고 공허한 어떤 빈 공간에 서 있고, 무언가가 나로부터 까마득히 멀어져 공포를 느끼는 그런 느낌이었다.
무려 20여 년을 동일하게 꿈속에서 겪은 느낌이다 보니, 증상이 없어진 지금 다시 꺼내어 보아도 생생히 기억나는 느낌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건대, 아주 어린 시절 엄마의 병 때문에 엄마 아빠와 억지로 떨어져 지내야 했던 경험이 어린 나에게 그런 생채기를 남긴 것은 아닐까 추측해본다
실제로 나의 어릴 적 기억은, 정확히 엄마 아빠와 다시 같이 살게 된 여섯 살의 월계동 집에서부터 시작한다. 그 이전 기억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물론 어린 나이이기도 했지만,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 자라며 많은 사랑을 받고 고모 삼촌과 추억도 많이 쌓았을 텐데, 어린 나에게는 그저, 생명줄 같은 엄마 아빠의 손을 놓치고 살았던, 잊고 싶은 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무더운 여름밤 공기 냄새를 맡으면 잊고 싶은 기억 하나가 불쑥 올라온다.
아빠가 일 나가고 없던 어느 밤, 고통에 몸부림치며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던 엄마가 어린 나에게 천원짜리 한 장을 던져주며 무턱대고 약을 사오라고 밖으로 쫓아낸 일이 있었다.
나는 그 천원을 들고 울면서 약국을 찾아가 "엄마가 약을 사오래요" 하소연했고, 무슨 약을 쥐어줘야 할지 난감한 약사 선생님이 이래저래 꾸려준 약 봉다리를 움켜쥐고, 사시나무 떨 듯 떨며 집으로 들어갔다.
아빠가 없는 집에 엄마와 단 둘이 남아있는 나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 폭탄을 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린 나는 그렇게 불안에 물들어 갔다.
학교에 가면 활발하고 성실한 학생이었지만,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그 길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집이 가까워질수록 심장은 콩닥거렸다.
오늘은 집이 어떻게 되어 있을까
엄마는 어쩌고 있을까
아빠가 퇴근하는 저녁까지 엄마를 상대해야 하는 건 내 몫이었다.
엄마는 어제 일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잠잠해졌다.
그럴 때 내가 엄마에게 "엄마가 나한테 소리지르고 욕했어"라고 말하면 생사람 잡지 말라며, 아빠한테 그렇게 이간질 시키지 말라고 나를 혼냈다.
자신의 증상과 발작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든가... 외면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의 관계가 활발하고 다양한 활동도 많이 하던 나는 항상 친구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한 가지 비밀이 있어야 했다.
다른 친구들 집에는 한 두 번씩 놀러가곤 했지만, 학창시절 내내 우리집에 놀러오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살림도 초라했지만 무엇보다, 그런 엄마가 있는 집에 친구를 초대할 수는 없었다.
친한 친구들은 넌지시 궁금해하기도 했다.
"오늘은 너희 집에 가면 안돼?"
"미안해... 엄마가 아프셔'
거절의 핑계는 매일 뻔했다.
아픈 엄마를 대신해서 나를 케어하는 아빠는 나의 우주였다.
아빠는 생활력이 아주 강했고, 극한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과 가정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언제나 나에게 자상하고 커다란 언덕이 되어 주었다.
엄마의 몫까지 나를 사랑해주었고, 나를 믿어 주었고, 그 길고 좁은 길을 함께 걸어가는 동지가 되어 주었고, 내가 힘들 때, 언제든 가서 쉴만한 쉼터가 되어 주었다.
최근, 한 전문가에게 심리상담을 받은 적이 있는데, 내가 이만큼 건강하게 자라고 더이상 다치지 않고, 이런 가치관과 이런 소망을 품는 어른으로 자랄 수 있었던 데에는 단 한 사람, 아빠의 희생이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아빠는 나에게 최후의 보루였고, 지금의 나와 우리 가정을 만든 숙련된 장인이었다.
아빠는 말했다.
"사랑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새 집을 지어 같이 사는 게 아니라, 헌 집에 들어가 같이 고쳐가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아빠는 삶이라는 터 위에 이유없이 날벼락처럼 떨어져 모든 것을 불태워버린 불행을 끌어안고,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실낱같은 희망들을 재료삼아 '우리'라는 헌 집을 뚜벅뚜벅 고쳐나갔다.
아빠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아빠의 한 걸음 한 걸음을 따라갔다.
그러면서 배웠다.
포기하지 않는 것, 쉽게 좌절하지 않는 것, 때로 삶이 힘들땐 저 높은 하늘과 저 먼 산으로 눈을 잠시 돌리는 법, 좋은 사람으로 산다는 것, 내게 주어진 인생을 향해 친절을 베푸는 법...
어쩌면 인생을 사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들이다.
나는 끝내 피아노를 배우지 못했다.
사진 속 어린 나는 피아노에 파묻혀 있는데... 엄마 아빠도 피아노를 잘 치는데...
정작 내가 피아노를 배워야 할 무렵에는 엄마가 아프고 가세가 기울어 피아노 학원에 갈 수 없었다.
90년대에 들어서니 왠만한 집 딸들은 다 피아노 학원에 다녔다.
학교에서 체르니 30번, 40번까지 친다는 친구들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 한 구석이 사르르했다.
친구들이 학교 오르간으로 자랑하듯 치는 음들을 흘깃 보고는 흉내내어 쳐보기도 했다.
엄마 뱃속에서 열 달 내내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태교를 해서인지, 나름 훌륭한 음악적 센스도 가지고 있고, 노래도 꽤 하는 편이고 기본적으로 음악을 좋아했다.
20대에 작은 교회를 다니면서, 피아노를 전공한 반주자 언니에게 코드 반주의 기초를 배우고, 혼자 교회 키보드로 이렇게 저렇게 연습을 해서 어느새 찬양단 반주가 가능하게 되었다.
기초가 부실해서, 발전에 한계는 있었지만, 내가 피아노를 연주하다니... 감격스럽고 뿌듯했다.
고장난, 엄마라는 피아노..
끝내 완성되지 못한 나의 피아노..
피아노는 늘.. 나의 아픔이자, 갈망이자, 아쉬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