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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주 Apr 16. 2024

40여 년이 지난 지금…

엄마의 발병이 내 돌 무렵이었으니, 엄마가 조현병 환자로 산지 41년이 되어간다.

조현병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던 시절, 엄마는 잔인한 병에 걸렸고, 형제 자매로부터 외면 당했고, 가난해졌고, 나약해졌고, 철저하게 자신을 잃어갔다.

하지만, 함께 하는 가족의 인내가 있었고, 희생이 있었다.

우리는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으며, 그 시간이 회복되는 과정의 한 가운데에도 있어 보았다.

그 어려운 성장기를 겪어 낸 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잠시 언급하기도 했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20대 중반까지 수면 중 놀라 깨어나는어려움을 겪었다.

잘 자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깨어 공포에 떨었다.

꿈 속에서 느껴지는 나만 아는 그 느낌. 공허한 공간 속에 나 홀로 떨어져 아득히 무언가로부터 멀어져 가는 알 수 없는 공포가 몇일에 한 번씩 나를 찾아왔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없어졌지만, 그 느낌만은 다시 꺼내어 재현해 낼 수 있을 만큼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사실 나는 아직도 가끔 화가 난다.

누구에게 내는 화인지도 모를 것이 가끔 올라온다.

나만 아는, 내 안의 분노. 그것은 내가 무방비 상태로 겪어야만 했던 불행했던 시간들에 대한 원망이고, 누구에게도 제대로 풀어보지 못한 응어리들일 것이다.

그리고 한 편으로 생각한다.

인정.. 나는 엄마를 아직도 인정하지 않는구나.

엄마가 아파서 내가 겪었던 슬픔들이 아직 억울하구나. 아빠의 무한한 사랑과 희생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지만, 여전히 내안에는 풀리지 않는 슬픔과 분노가 있다는 것을 가만히 깨닫는다.


흔히들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아 기르다보면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거라고들 하는데 나는 그 반대였다.

어떻게 이렇게 어린 아이를 모질게 떼내어 놓고 살 수 있었을까

어떻게 아이에게 그런 아픈 말을 하고 소리를 지를 수 있었을까

어떻게 이 귀한 아이를 그런 상황으로 내몰 수 있었을까…

그것이 엄마의 진심이 아니고 당연히 병으로 인해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안의 어린 나는 여전히 화가 나 있다.


엄마의 발작 또는 히스테리를 눈 앞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흡수해야 했던 7살 8살 10살 13살 어린 아이에게는 그 자체가 공포이고 상처로 남아있다.

엄마는 항상 경계의 대상이었고, 그런 나를 한결같이 보호해주는 사람은 아빠였다.

엄마를 향한 분노일까? 나에게 그런 고난을 허락한 세상에 대한 원망일까?

이 지점에서 한가지 단어가 떠오른다.


인정하는 것,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내 아이의 조금 부족하고 어린 모습은 사랑과 믿음으로 바라봐 줄줄 알면서 부모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일은 이토록 어려운 일이었구나. 깨닫는다.

내 인생의 절뚝거리는 한 부분을, 그것도 내가 아닌 타인을 온전히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이 이렇게나 힘든 일이구나, 알아간다.

인정하지 못해서 마음이 갈등했고, 걸음은 절름거렸다. 그리고 아팠다.

상황을 직시하고 주어진 그대로 인정하는 것.

어찌 보면 세상의 많은 문제 해결은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빠는 엄마를 끝까지 감당하겠다고 말한다.

내가 힘들지 않게. 엄마로 인한 힘듦이 나에게 까지 뻗치지 않도록.

아빠는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아빠는 엄마를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였구나.

그래서 더이상 화도 나지 않고, 엄마가 때론 측은하고 때론 귀엽고, 그렇게 엄마를 끌어안고 갈 수 있구나. 생각했다.


엄마는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편안한 날들이다.

한번은 죽다 살아났고, 병으로 인한 증상은 약을 통해 거의 사라졌고, 아빠는 엄마 옆을 지키고 있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손주가 둘이나 있다.

아빠와 나에게도 지금 같은 호시절이 없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좋은 집에 살아서가 아니라, 모진 시간들을 다 살아내고 이만큼 버텨오니 남들보다 더 많은 것에 감사하며 살 수 있게 되었다.

10년 전, 20년 전, 30년 전… 귀를 틀어막고 방바닥을 구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엄마의 모습과 함께 그 숱한 세월들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아빠. 우리가 살아온 세월이 참 기가 막힌 세월이었지?”

“그랬지.. 지금 이렇게 사는 게 나는 꿈만 같아”

그렇다. 우리는 꿈같은 시간을 살고 있다.


어느 드라마 대사처럼 슬프고 힘든 것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떻게 그것들을 인정하며 살아야 할까.

그것이 무엇이든 나의 것이니 소중히 여기는 것에서 출발하자고 생각해본다.

소중히 여기고 자주 웃고, 아픈 만큼 작은 행복들을 돌아보며 살아보자고 다짐한다.

그렇게 잔잔히 행복한 나를 끌어안아주다보면, 어느새 내 깊은 슬픔도, 연약함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엄마의 이야기이지만, 결국 나의 상처와 아픔을 힘겹게 꺼내어 쓴 이 글이 누군가의 힘겨운 여정에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길 소망하는 마음으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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