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휴직한다고 했을 때 내가 생각했던 휴직은 여행이었다. 한국도 해외도 코로나가 이렇게 심각하지 않았을 때, 그러니까 해외여행이 여전히 가능했을 때 한 달간의 여행을 꿈꿨다. 오랜만에 기나긴 여행을 가리라고 마음먹고 항공권과 숙박까지 찾아 놓았었다. 결제를 망설이다 하루 미뤄두었는데 바로 다음날 전 세계의 상황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그래서 여행 계획은 주머니 속에서 꼬깃꼬깃 해져버렸다.
휴직 첫 주였던 저번 주, 코로나 블루*가 나를 덮쳤다. 평소에 낮잠도 거의 안 자는데 해가 중천에 떠있는 대낮에 침대에 가만히 누웠다. 나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나는 회사원이기도 하고 대학원생이기도 하다. 하지만 휴직 중인 회사와 온라인 강의로 대체되는 대학원은 내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갖게 했다. 속한 곳은 있지만 몸은 집에 있고 생산 활동을 하고 있지 않으니 나는 누구인지, 미래는 오는 건지... 갑자기 눈물이 고이기도 했다. 이렇게 무기력해져 본 것은 처음이었다.
* 코로나 블루(Corona blue) : '코로나 19'와 '우울감(blue)'이 합쳐진 신조어로, 코로나 19 확산으로 일상에 큰 변화가 닥치면서 생긴 우울감이나 무기력증, 시사상식사전
주말 동안 마음을 다잡았다. 원래 휴직하면 뭘 하려고 했는지 생각했다. 여행지에 가서 책을 한가득 읽고 마음을 내려놓을 글을 쓰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안될게 뭐가 있나, 생각하고 무작정 걸었다. 예쁜 카페를 찾으려고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아니다, 그냥 걷다 찾자. 여행지에서 그런 것처럼, 하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여행 온 것처럼 내 마음에 드는 카페가 나올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도로변에 있는 지하철 길은 홍콩 공항에서 도심으로 나가는 기찻길처럼 보이기도 했다. 걷다 보이는 낯선 동네의 구석은 일본의 어느 골목길 같았다. 걷기에 지칠 때 즈음 숨겨져 있는 널찍한 카페를 발견했다. 여행지에서 그러하듯 커피 한잔을 시키고 노트북을 열었다. 그래, 여행이 별거냐. 새로운 곳에, 와보지 않은 곳에 와서 새로운 감정을 느끼면 그게 여행이지. 그게 내가 하는 여행의 이유인데.
이 감정을 만끽하고 있을 때 학생처럼 보이는 어린 청년과 엄마가 들어왔다. 모자가 데이트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생각하던 와중에, 남학생이 갑자기 카페 한편에 있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리고 'Let it be'를 치기 시작했다. 세상에, 한국에 이런 감성이 있었나. 어느 여행지에서도 보지 못한 갑작스러운 피아노 연주였다. 카페에 손님은 그들과 나 하나뿐이었다. 나도 보고 있던 책을 내려놨고 카페 사장님도 카페에서 흐르는 노래를 끄고 피아노 연주를 들었다.
항공사에 다니지만,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여행은 있었다. 저번 주의 우울감은 누그러졌다. 매일매일을 여행하듯이 살아야지, 사회적 거리두기가 가능한, 한적한 곳으로 걸어 나가야지. 우울감이 나를 잡아먹기엔 날이 너무 좋다. 모든 것이 지금보다 나아진 미래는 반드시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