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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재소녀 Apr 27. 2020

인생 첫 자취의 시작


2019년 가을, 자취를 시작했다.


대학교 4년 내내 왕복 3시간이 걸리는 통학을 했고, 졸업 후에는 왕복 3시간이 넘게 걸리는 통근을 했다. 나는 아침에 부산스럽게 움직인다. 일찍 일어나서 일기도 쓰고 운동도 하고 심지어 밥도 먹어야 하는데 회사는 너무 멀었다. 통근 4년이 다 되어갈 무렵 체력에 한계가 왔다. 그래서 작년 가을, 인생에서 크나큰 결정을 내렸다. 갓난아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의 인생이 담겨 있는 집을 처음으로 나오기로 결심한 것이다.


매사가 그렇듯, 마음먹기가 힘들다. 자취를 결심한 순간부터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감사하게도 주변에 첫 시작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게 2019년 11월 1일, 인생 첫 자취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선택으로 인생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혼자 보내는 아침, 저녁 시간이 변화를 낳는다. 통근 시간도 나름대로 책도 읽고 영화도 보며 알차게 보냈지만 집에서 홀로 보내는 시간은 다르다.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얻으니 체력은 덤이요,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매일 걷기 시작했다. 하루 일과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에 꼽힌다. 한강을 옆에 끼고 걷는 기분이 좋다. 평생 집 주변에 흐르는 강은 탄천이 전부인 줄 알았던 나에게 한강은 신세계였다. 아득한 한강의 끝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바닷가에 있는 것 같다. 노을 지는 한강을 거닐 때면 머릿속이 가득하다. 고민거리가 해결되기도 하고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가끔씩은 내 생각에 내가 놀라 걸음을 멈춘다. 생각이 날아갈까 메모장에 빼곡히 적는다. 


스마트워치를 보면 하루에 10,000보는 기본이다. 특히 재택근무 기간에는 퇴근 시간인 5시가 되면 바로 한강으로 나와 두 시간씩 걸었다. 하루의 피로가 걸음 하나하나에 날아간다.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걸으면 세상을 알게 되고, 음악을 들으면서 걸으면 나를 알게 된다. 나도 나를 몰랐던 과거가 아쉬울 만큼 요즘은 나에 대해 알아가는 중이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세상을 조금은 다르게 대할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싶은 공부를 찾았고 대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만약 경기도의 원래 집에서 계속 살았더라면 대학원은 선택지에 존재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고자 하는 대학원이 아주 멀리 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도 한 시간이나 걸린다. 자취를 시작하면서 대학원 수업을 들을 여유가 생겼다. 물론 지금은 온라인 강의로 진행되어서 큰 의미는 없지만, 이 상황이 진정되고 나면 자취는 빛을 발할 것이다.  


대학교 졸업 이후로 뇌가 굳은 느낌이었다. 새로운 정보가 들어와도 생각하지 않고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소화할 틈도 없이 정보를 보고 넘기기만 했다. 대학원이라는 불씨로 세상이 확장되는 기분이 좋다. 물론 고등학교 때처럼 몰입해서 공부하는 건 아니지만 깨어있어야겠다는 다짐만으로도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뇌가 다시 말랑말랑 해지는 느낌이다. 삶이 조금 더 단단해졌다.



가장 큰 변화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 지금까지는 가족과 사회가 나에게 기대하는 삶에 부응하며 살았었다. 10대의 공부, 그 결과로 얻은 대학, 전공 그리고 심지어 세상에 대한 생각까지도 내 것이 아닌 느낌이었다. 표준화된 교육을 받으면서 잘 다져놓은 길을 걸어왔달까. 일탈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말이다. 선택에 자유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선택의 범위 조차 내가 학습한 범위 내에 있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집을 나오면서, 그러니까 지금까지 내 평생을 살아온 환경을 벗어난 후로 삶의 주체성이 강해졌다. 이직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이 바뀌었고 자취를 시작하면서 사는 곳이 바뀌었다. 익숙했던 삶의 대부분이 바뀐 것이다. 편한만큼 안주하게 되었던 전 회사, 평생을 살아와 삶의 기본값이었던 집을 두고 떠나는 건 엄청난 변화였다. 


상상 속에서 이럴까 저럴까, 시나리오만 썼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상이 너무 공고해서 변화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변화가 있어야, 내 의지가 담긴 행동이 있어야 인생이 다채로워진다. 자취를 시작하고 일상을 벗어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사라졌다. 오롯이 내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서울 살이가 좋다. 자취가 가져오는 나비효과가 좋다. 


"시간을 달리 쓰는 것, 사는 곳을 바꾸는 것,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것. 이렇게 세 가지 방법이 아니면 인간은 바뀌지 않는다. '새로운 결심을 하는 것'은 가장 무의미한 행위다.” - 난문쾌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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