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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재소녀 Aug 04. 2019

무의식과 본능에 당당해지는 법

니체와 애덤 스미스


기술 발전의 사회적 부작용을 그린 영국 드라마 블랙 미러(Black mirror) 시리즈 중에 Shut up and Dance 편이 있다. 익명의 컴퓨터 해커가 개인의 인터넷 기록을 볼모로 잡아 여러 사람을 조종하는 이야기다. 등장인물들은 생각보다 쉽게 해커에게 파괴당한다. '파괴'라는 단어가 과하지 않을 정도로 그 사람의 인생을 망쳐버린다. 얼굴도 목소리도 없는 해커는 문자 메시지만으로 사람을 조종한다. 그 사람들이 해커에 의해 휘둘리는 이유는 그들의 행동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회적 통념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 개인의 공간에서 컴퓨터와 함께. 


이 편을 보고 '인간이 가장 추해지는 순간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굉장히 많은 인물, 아니 거의 대부분이 그들의 성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잘못된 방법을 사용했다. 명확하게 그들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나오지는 않았지만 몇 가지 단서로 성욕을 위한 'kids'(어린아이) 영상, 가정이 있는 남성의 성매매 시도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성욕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욕구를 채우는 방법이 윤리적으로 용납될 수 없었다. 그래서 해커에게 협박당했고 해커가 조종하는 대로 움직였다. 


그들이 추해진 것은 본능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이성이 앞섰더라면 절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나름대로 사회의 통념에 반하지 않으려 혼자 해결하려 했으나 해커에게 들킨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본능에 당당하지 못했다.




'사는 게 힘드냐고 니체가 물었다'(박찬국, 2018)을 보면 '본능'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니체에 따르면 '모든 좋은 것은 본능'이다. 자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감정과 생각을 다스리는 것뿐만 아니라 신체를 다스려야 한다고 한다. 나는 이 부분을 본능이 건강해야 그 사람의 삶도 건강해진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영어 속담 중에 " sound mind is in a sound body"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마음이 깃든다)와 일맥상통한다. 건강한 신체와 정신은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는 가치다. 


여기서 어떻게 해야 건강한 본능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생긴다. 이직 전 회사에 배울 점이 많았던 상사분이 계셨다.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나도 저렇게 건강한 생각을 가지고 싶다"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 분과 오랜 대화를 자주 나눌 수는 없었기에 대화를 한 날은 일기에 대화의 내용과 내가 느낀 감정을 적었다.  그 시절 일기에는 "무의식에 당당한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적혀있다.


말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가치관이 나온다. 말에 정신이 깃들어서 나오는 거다. 아주 가끔 술을 먹거나 피곤하면 말을 '배설'하게 되는 때가 있다. 이성을 찾고 '왜 그런 말을 했지?'라는 생각을 타고 타보면 결국엔 나의 무의식에 부끄러운 생각과 가치관이 있다. 무의식에 당당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여기에서 나왔다. 내가 나를 컨트롤할 수 없을 때에도 타인 앞에서, 그리고 나 스스로 당당해지려면 무의식이 건강하면 된다. 그런데 그 방법을 찾지는 못했었다. 



그러다 최근에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애덤 스미스 원저, 러셀 로버츠, 2015)을 읽다가 답을 찾았다. 애덤 스미스를 경제학 도서가 아닌 철학으로 접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 책은 러셀 로버츠라는 스탠포드 교수가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을 현대인이 이해하기 쉽게 풀이한 책이다. 애덤 스미스는 말한다. 공정하게 나를 관찰하는 사람이 있다고. 정한 관찰자가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그것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게 맞는지 아닌지를 판단해준다는 것이다. 양심과는 별개의 문제다. 


사회적 가치, 윤리적인 문제를 논의할 때 개인의 가치관이 많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보편적인 가치'를 논할 때 '보편적인' 것에 대한 의견이 사람마다 다르다. 그래서 이런 깊은 대화를 할 때 그 사람의 의식을 넘어선 본능적인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람들은 다 안다. 스스로를 객관화했을 때와 타자의 입장에서 바라보았을 때 지금 내 생각이 건전한지 아니면 사회의 통념에 반하는 것인지를. 잘못된 생각은 개인이 정의 내린 양심에는 떳떳할지언정 인류 보편의 상식으로는 이해될 수 없다.


책을 읽으면서 정말 "아! 이거구나!" 하는 A-HA Moment! (아하 모먼트)가 왔다. 계속 가지고 있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는 순간의 쾌감은 정말 행복했다. 물론 내가 애덤 스미스의 철학을 단번에 이해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어떻게 나의 본능에 당당해질 수 있는지, 나의 무의식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작은 실마리를 찾은 느낌이다. 그래서 요즘의 나는 공정한 관찰자와 함께 살아간다. 늘 나를 이성적으로 판단하고자 한다. 


아주 작은 실천 법은 이렇다. 나는 혼자 밥을 먹을 때 서서 먹거나 한 번에 많은 양의 음식을 입에 넣을 때가 있다. 타인 앞에서는 절대 하지 않는 행동이다. 이러한 모습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는 뜻이다. 공정한 관찰자의 존재를 인지하고 난 후로 행동이 달라졌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와 똑같이 식사를 한다. 아무리 허기가 져도 예전처럼 우악스럽게 먹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과식하는 날도 줄어들었다. 


나를 객관화하고 나를 지켜보는 내가 만든 '관찰자'를 의식하는 순간 생긴 변화다. 인간도 동물이라지만 짐승과 인간을 구별하는 것은 '이성' 아니던가. 식욕이라는 기본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한 동물적 행위도 이성적인 식사 시간으로 만들 수 있다. 식욕은 하나의 욕구에 불과하다. 이렇게 작은 본능부터 당당해지기 시작하면 더 많은 삶의 영역에서도 공정한 관찰자가 보기에 '괜찮은' 삶이 되지 않을까? 




도덕감정론 원문을 본 것이 아니라 내가 그의 생각을 온전히 읽은 것은 아니다. 그래도 삶을 꾸려나갈 작은 뼈대 하나를 찾은 느낌이다. 1년간 품어왔던 질문에 대한 답을 300년 전 사람에게서 얻은 것이다. 무의식에 당당해지는 방법은 내 안에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공정한 관찰자가 내 생각, 나의 행동,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나의 본능의 옳고 그름에 대해 판단해줄 것이다. 존재를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조심하게 된다. 한번 더 생각하게 된다.


더 많이 읽고 생각해서 나에게 당당한 사람이 되기를. 혼자 있는 시간이 남에게 보이더라도 공정한 관찰자가 평가하기에 당당하고 건강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본다. 그 여정에 책과 글쓰기가 늘 함께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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